퇴근길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날
어른이 되고 알게 된 맛이 있다. 회의 맛, 가지의 맛, 콩국수의 맛, 평양냉면의 맛, 그중 맥주의 맛을 알게 된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처음 맥주를 맛 본건 학창 시절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왔더니 퇴근하신 아빠가 친구분들과 거하게 술상을 벌이고 계셨다. 난 투명 유리잔에 따라진 맥주가 보리차인 줄 알고 홀짝 집어마셨다. 순간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아빠와 아저씨들은 그런 내 표정이 웃겨 죽겠다는 듯 껄껄대셨다. 늘어선 빈병을 보며 이토록 맛 없는 맥주를 대체 무슨맛으로 드시나 생각했다.
스무살 그 시절엔 청춘의 힘으로 소주를 마셨다. 맛을 알고나 마시는 건지, 주머니가 가난해서인지, 아니면 나도 모를 패기에 마시는건지 몰랐다. 한 가지 확실한 이유는 술보다 술자리가 좋아서 마셨다. 왁자지껄 우리가 남이냐고 외치는 친구들이 영원할 것 같아서 마셨다. 생각해보면 그건 술의 맛이라기보단 청춘을 안주 삼은 사람의 맛이었다. 그렇게 흘러 회사에 입사하니 이젠 일로 술을 마셨다. 상사가 따라주는 맥주는 원샷이라며 회식을 했고, 미팅이나 업무의 연장으로 마시기 싫은 날 마시는 술도 있었다. 때론 야근 후 동기들끼리 따라주는 위로의 한잔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있었지만 늘 다음날 출근이란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맥주를 좋아하게 된 건 30대가 훌쩍 지나고 나서였다. 퇴근 후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모든 게 풀어지는 시간이었다. 몸도 마음도 느슨해지는 시간. 맥주 한잔에 좋은 일은 자축하고, 맥주 한모금에 그날의 슬픔과 우울했던 일들은 삼키고 넘겨버렸다. 맥주를 마시고 찌푸렸던 나는 그렇게 아빠가 드시던 맥주 맛을 알게 되었다. 나이로 터득한 어른의 맛이었다.
더블린은 그런 나에게 흑맥주 기네스의 맛을 알게 해 준 도시였다. 뭐랄까 자주 마시던 시원하고 톡 쏘던 맥주 맛이 아닌, 조금은 진중하고 깊은 맛이랄까. 깜깜한 밤 달콤함과 씁쓸함이 섞인 맥주가 이런 게 인생 아니냐고 묻는 것 같은 맛이랄까? 청량한 맥주 사이로 스며든 검은 맥주의 맛은 달랐다.
더블린에 도착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비행기와 입국심사 때문이다. 런던 공항에서 악명 높은 아일랜드 저가항공 라이언에어는 티켓을 프린트해오지 않았으니 몇십 유로를 내라고 했다. 프린트 한 장에 생돈 몇만 원을 날릴 수 없었다. 공항을 뛰어다니며 컴퓨터를 찾았다. 겨우 프린트 한 티켓을 쥐고 아슬아슬하게 탑승했다. 한숨 돌렸다 생각했는데 더블린에서는 더 힘든 입국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넌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해? 일이 마음에 들어? 마케팅과 콘텐츠에 관련된 일을 하면 더블린을 좋아할 것 같은데 어때? 여기서 얼마나 있고 싶어?" 융단 폭격 같은 질문에 손짓 발짓 섞은 영어로 대답을 하고 있자니 "나는 당신네 나라에 살고 싶은 생각이 1도 없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욱하고 올라왔다. 바로 그때 꽝! 하는 도장 소리와 함께 난 더블린 시내로 풀려나왔다.
그렇게 반나절을 시달리고 숙소에 도착했다. 작은 3층짜리 아일랜드 호텔임에도 턴테이블과 마샬 스피커가 있었다. 아래는 스티비 원더부터 이름 모를 아일랜드 밴드의 음반이 가득했다. 음악과 뗄 수 없는 더블린 호텔다웠다. 음반을 틀고 앉으니 스르륵 긴장이 풀리고 허기와 피곤함이 몰려왔다. 아껴둔 한국 컵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잠시 눈을 붙였다 밖에 나가야지' 생각하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눈을 붙였다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설마설마하며 시계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며칠 되지도 않는 일정,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잠으로 하루를 날리다니...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잠든 내가 원망스럽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푹푹 한숨을 쉬며 창밖을 보니 런던에서도 오지 않던 비까지 내린다. 화창하던 어제의 날씨가 생각나 더 아쉬웠다. 비는 내리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허망한 마음을 이끌고 일단 기네스 공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난 더블린 기네스와 처음 만났다. 조금 우울한 만남이었다.
공장은 입구부터 꼭대기까지 기네스로 가득한 곳이었다. 대문부터 기네스, 입구도 기네스, 층층의 계단도 액자도 기네스, 기네스의 역사, 기네스의 제조과정, 기네스와 함께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흑맥주에 대한 아일랜드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거대한 인격체처럼 보이던 기네스의 기운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맑은 날 보면 더없이 멋질 것 같은 전망대는 회색 빛 하늘이 가득 차 있었다. 입장권을 구매하고 받은 쿠폰을 내밀었다. 즉석에서 기네스 생맥주를 한 잔을 따르기 시작했다. 맥주잔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갈색 맥주가 검은색이 될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렇게 받아온 흑맥주를 한 입 꼴깍 마셨다.
등 뒤로 펼쳐진 회색 구름 같은 맛이 지났다. 어둡고 캄캄한데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보드라웠다. 다시 입을 대고 꿀꺽 한입 더 마셨다. 진한 커피 같기도 하고 술 같기도 한 맥주가 목을 타고 흘렀다. 묵직한 맛 사이로 단 맛이 나는 것 같더니 고소함 뒤에 씁쓸함도 느껴졌다. 맥주 맛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기네스는 정말 한국에서 먹던 거랑 차원이 다른 것 같아" 그 차원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른 건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맥주에 여행의 맛이 더해진 것인지, 아니면 더블린 본토의 기운이 전해진 것인지, 이 흐린 날씨와 제조장 분위기가 한 몫한 것인지... 이 모든 게 다 섞인 맛인지. 하지만 그동안 내가 먹던 캔맥주와 차원이 다른 맛이 분명했다. 기네스 한 잔을 마시니 날이 개이듯 조금씩 기분도 풀렸다. 어제 하루 날린걸로 여행이 끝난 것도 아닌데 뭘..이란 생각도 들었다. 한잔 더, 한잔 더 기네스를 마셨다. 결국 알딸딸한 기분에 흥에 겨워 기네스 기념 티셔츠를 품에 안고 '여름에 한국에서 입고 다녀야지'라며 공장을 나왔다.
어쩔 줄 몰라 기네스 공장부터 여행을 시작했지만, 나오는 순간 저녁 목적지는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다. 더블린에서 뭘 고민하나 싶었다. 맥주와 음악으로 충만한 펍에 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더블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템플바를 찾아가서 문을 열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천장까지 가득한 술병, 바에 가득 찬 사람들의 열기, 그들 속에서 음악이 세상의 전부라는 표정으로 노래하는 뮤지션들, 그들은 열창을 하고 사람들은 떼창을 하고 있었다. 기타 치고, 두드리고, 노래하는 이들의 한 손엔 기네스가 함께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래 이곳은 더블린이 아니던가. U2가 음반을 녹음한 도시, 영화 원스의 배경이 된 도시, 수많은 거리 뮤지션들의 노래가 골목을 채워 이어폰이 필요 없는 도시였다.
기네스 한 잔을 주문하고 갈색 맥주가 검은빛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한 모금 마시며 사람들 속으로 흐르듯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오아시스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마셨다. 왜 더블린 사람들이 한 잔의 기네스면 충분한 저녁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퇴근 후 마시던 기쁨과 슬픔의 맥주 한 잔이 생각났다. 지금 내가 마시는 맥주는 내 일상의 맥주와 다른 맛이었지만, 더블린 일상의 맛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1년 365일 매일매일 마시고 노래하는 곳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밤은 깊고, 노래는 계속되고, 그렇게 더블린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골목의 펍마다 음악과 맥주로 차고 넘쳤다. 거리는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로 가득했고, 흘러나온 사람들은 마치 오늘 밤이 마지막 날인 듯 마시고 노래했다. 취한 밤이었다. 더 취해도 좋을 밤이었다. 음악과 맥주만 있다면 우리가 어디까지 충만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밤이었다.
더블린 호텔에 도착했을 때 침대 옆 테이블에 3M 주황색 귀마개가 놓여있었다. 독서실에나 있을법한 이 귀마개가 왜 여기 있지? 갸우뚱했었다. 그 밤 귀마개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시고 노래하는 더블린은 새벽까지 잠들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거리로 나왔더니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듯했다. 해가 뜨고 말끔하게 정리된 거리 위 사람들은 출근을 하고 있었다. 길가에 나뒹구는 몇 병의 빈병과 유리조각들이 어젯밤이 신기루같은 꿈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밤과 완전 다른 모습의 낮이 어색했다. 음악으로 가득 찼던 펍들은 고요히 잠들어있었다.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라는 얼굴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들이키고 있었다. 다시 저녁이 찾아오면 어제 같은 풍경이 펼쳐질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면서도 꿈처럼 아득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끔 더블린이 생각날 땐 기네스를 마셨다. 우연히 맥주집에서 기네스를 만나면 잊었던 더블린 생각이 나기도 했다. 특히 기네스 생맥주를 파는 곳이 있으면 한 잔씩 시켜 먹어보곤 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더블린에서 마시던 기네스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 마시던 기분 때문인지, 생산보다 보관법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맥주 맛 때문인지 맥주 전문가가 아닌 여행자가 알턱이 없다. 하지만 '맥주 맛'이 다른 한 가지 이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저녁의 맛'때문이다. 내가 퇴근하는 테크노벨리에선 춤추고 노래하는 더블린과 같은 저녁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블린의 밤은 오직 그곳에만 존재한다. 내가 겪은 취한 밤도 그날 하루뿐이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난 결코 같은 맛의 맥주를 마실 수 없는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마시던 기네스는 365일 노래하고 취한 더블린의 맛이었다. 다 같이 열창하던 밴드의 노래가 담긴 맛이었고, 조금 울적한 더블린 풍경과, 비가 그친 후의 서늘함이 담긴 맛이었다. 기네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쌓아 둔 역사와 시간의 맛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펍에 모여 떠들며 수다와 음악을 안주 삼아 한 잔의 맥주를 기울이겠지. 또 누군가에게 한 잔의 기네스면 충분한 저녁 아니냐며 농담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똑같은 저녁을 가지지 못하는 여행자는 현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캔맥주를 마신다. '정말 한국에서 마시는 기네스는 더블린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퇴근길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게 어른의 맛이라고 생각하면서. 당신들이 다시없을 밤을 보내고 아무 일 없던 듯 일터로 돌아가는 아침처럼. 나 역시 내일이 찾아오면 이 곳에서 그런 아침을 맞이할 거라고. 언젠가 다시 한 손에 기네스를 들고 더블린 바에 앉아있는 그 밤을 꿈꾸며 말이지. 미래의 그날 기네스 맛은 또 어떨까, 그 어른의 맛이 기대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