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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조던 May 07. 2018

아니 이토록 매력적인 도시를 보았나, 베를린

일도 사람도 여행까지도 권태로운 날

살면서 점점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 '새로움'인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기까지의 하루가 늘 새롭고 설레는 사람이 있을까. 매일 똑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같은 길로 출근을 한다. 이미 맛을 알아버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익숙한 것 투성이인 집을 향해 퇴근을 한다. 환경을 넘어 어느 순간은 나라는 사람 조차 다 알아버린 시간이 온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누굴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지, 지금 필요한게 뭐고, 뭘 먹으면 좋을지 학습되고 매뉴얼화된 인생. 이토록 모든 게 예측 가능한 채 비슷하게 흘러가는 인생을 우리는 '안정적이다'라 부르기도 하고 '권태롭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슷비슷한 하루가 이어질 때 우리는 새로움과 익숙함이라는 묘한 경계에 서게 된다. 내 삶이 이렇게 흘러가도 될지 갸우뚱거린다. 새로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지만, 여행까지도 권태롭게 느껴지는 시점이 온다. 내가 어떤 스타일의 여행을 좋아하는지 어디로 떠나면 만족할지 떠나기 전부터 알게 되는 것이다. 다녀왔던 아시아나, 동남아의 풍경이 그려진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국적이었지만 몇 번 본 뒤로는 비슷해 보이는 유럽식 건물, 어디선가 본듯한 골목과 거리, 노천카페에서 먹는 커피와 빵, 나와 다른 인종을 보는 어색함까지도 익숙해진다. 그럴 때면 여행도 새로움의 돌파구가 아닐지 몰라...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낯선 익숙함이 그리워서 또 별다른 방안이 없어 떠나기도 한다. 그런 여행도 있다.


베를린은 그렇게 일도 사람도 여행까지도 권태롭던 날 만나게 된 도시였다. 직장의 권태기는 3,6,9년 순으로 찾아온다더니 정말 6년이 지나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 무기력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무턱대고 낯선 환경에 노출되고 싶었다.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는지 1년 정도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도 일었다. 애초에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어디에서 뭘 먹고살지 현실적인 고민은 1%도 없는 단순한 욕망이었다. 연초에 사둔 베를린 비행기 티켓을 바라보며 권태로운 날들을 버텼다. 주변에 베를린을 다녀온 사람도 거의 없없고, 서점에 가도 다른 유럽 도시들과 달리 가이드 북도 많이 없었다. 유럽 일주나, 독일 여행에 일부 포함된 정도였으니 말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도시로 떠난다는 점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난 나만의 독일 이미지를 생각하며 베를린으로 떠났다. 뭔가 근엄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있을 것 같아. 우리처럼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으니 베를린 장벽에 가면 무겁고 조금 우울하려나, 유럽 중에서도 남다른 선진국일 거야. 독일인은 분명 키가 클거야. 190이 넘는 사람들도 많겠지. 사람들이 정직하고 규칙도 잘 지킬 것 같아. 소시지를 물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려나? 그래도 유럽 대륙인데 크게 다르겠어? 이후 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빠뜨리고 상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여행 온 곳은 여느 독일이 아닌 '베를린'이라는 것을 말이다. 독일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만으로 절대 정의할 수 없는 제3의 도시가 '베를린'이었다.


일단 베를린에 대한 첫 느낌은 모두 내 예상과 달랐다. 우리나라 김포공항보다도 작은 공항에 내렸다.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키가 크지 않았다. 딱딱한 분위기보다 자연스러운 느낌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전형적인 유럽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역동적인 도시였다. 서쪽 베를린에 머물 때는 오히려 뉴욕이나 홍콩을 연상시키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했다. 도시 복판에 거대한 공원 티어가르텐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나, 빌딩 사이로 잘 닦여진 자전거 도로를 만날 때면 미국과 유럽이 섞여있는 느낌도 들었다. 네모난 도시 한복판을 걷다가 하늘에서 툭 떨어진 듯한 베를린 장벽의 일부를 만났다. 세계 2차 대전으로 지붕이 날아간 교회를 마주치기도 했다. 이미 번쩍이는 미래 도시로 넘어온 베를린에 덩그러니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시대의 공존을 눈으로 마주치는 도시는 세상에 베를린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베를린(구 서독)과 동베를린(구 동독)이 하나 된 이 특별한 도시를 감히 어떤 말로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한 도심 속 베를린 장벽

이렇게 변화무쌍한 기분은 베를린 장벽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찾아갔을 때 절정에 다 달았다. 딱딱하고 거대한 회색 장벽이 도시를 가르고 있을 것 같았지만, 아티스트들이 그린 컬러풀한 벽화들이 갤러리처럼 펼쳐져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역사적인 장벽 앞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순간 저들과 나는 결코 같은 무게의 기분으로 이 장벽을 바라보지 못하리라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오늘도 남과북으로 나눠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아직도 현재형인 분단이 베를린에서는 과거의 흔적이 되어 남았다. 


부서진 베를린 장벽을 바라보니 생각보다 폭이 얇았다. 엄청난 두께의 벽이 동독과 서독을 가로막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내 손바닥만 한 한 뼘짜리인 장벽이라니. 우리를 나누고 선 긋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너지면 허무한 것인가 싶었다. 수십 년간 오가지 못했을 고작 한 뼘 짜리 벽을 넘어봤다. 하나의 땅에 그어진 분단의 흔적을 넘나들며 "평화와 번영과 자유를 위해 문을 열고 장벽을 부수라"는 역사적인 문장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베를린 장벽 끝까지 걸어가니 동서 화합의 상징인 오베르바움 다리가 나왔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였다. 노란 트램이 이제는 못 갈 곳이 없다는 듯 유유히 다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다리 아래에선 국적을 알 수 없는 베를린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다리 위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배경 음악이 깔렸다. 사람들은 하나 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위로는 다시 한번 트램이 지나고, 아래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슈프레강이 흘렀다. 강물 위로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물이 부드럽게 화해한다는 시간이었다.


도무지 다리 위를 떠날 수 없어 한참을 멈춰 있었다. 동쪽과 서쪽 베를린 풍경을 번갈아보았다. 이제는 하나가 된 두 도시를 눈으로 이어보았다. 베를린 장벽을 타고 온 감정이 차올라 강까지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나 또한 이 도시의 일부가 되어 아픈 역사와 분노와 미움과 화해하고 싶었다. 이어진 다리가 부러웠고, 서쪽에서 동쪽을 자유롭게 넘어가는 트램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미래이길 소망했다.

다리를 건너 동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 들어서는 순간 '베를린스럽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도시의 정점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층빌딩이 가득했던 도시풍의 서베를린과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건물의 높이, 생김새, 색감까지 모든 게 달랐다. 다리를 건너 새로운 유럽에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동네의 작은 놀이터조차 빈티지한 느낌이 났다. 거리의 작은 신호등도 서쪽 베를린의 것과 달랐다. 동유럽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으나... 예술가들의 그라피티가 동네와 건물들을 덮고 있었다. 베를린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감히 다음 골목을 예측할 수 없었다.


동네는 예술과 자유를 부르짖는 청춘들의 젊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양한 세계 음식을 파는 식당과, 카페, 샵들과 술집이 줄을 이었다. 저녁이 찾아오자 위험해 보일 정도의 허물 벗은 날것의 분위기가 도시를 지배했다. 우아한 유럽에서 보지 못할 역동적인 공기였다. 동네 공원의 분위기도 달랐다. 영국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우아한 장미와 정돈된 꽃들이 자리 잡은 유럽의 공원이 아니었다. 거칠고 풀어진 보헤미안스러운 공원이었다. 평온함이 아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두려운 설레임이 일었다. 규칙에서 벗어나 풀어지고 무너져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이렇게 두려울 정도로 낯선 두근거림이 얼마만인지...하늘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에 분홍빛 구름이 섞이고 있었다. 공기부터 새롭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정의할 수 없는 베를린에 푹 빠진 나는 다음날부터 베를린 탐방에 여념 없었다. 동쪽 베를린을 누리며 곳곳에 얼마나 감각적인 공간과 카페가 많은지 알게 되었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옷가게나 아티스트의 작은 샵들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이민자가 많은 베를린엔 비싼 물가를 견디지 못하고 파리나,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예술가들이 많다는 사실도 듣게 되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베를린에 왔다고 했다. 말만으로도 희망찬 기운이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내가 잃어버렸던 감정이었다. 점심으로 차가운 독일식 파스타를 먹고 있으면 뒤에 앉은 아티스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녹음이 가득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들과 점심을 먹고 있노라면 나 역시 꿈꾸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말엔 벼룩시장 구경만 한 놀이가 없었다. "내 발에  안 맞아서 너에게 팔게"라는 말과 함께 신상 아디다스 러닝화를 단돈 20유로에 사 왔다.(한국에선 10만 원이 넘는다며 신나서 펄쩍 뛰며) 아티스트가 베를린 창문 모양을 찍어낸 에코백도 팔에 걸었다. 다양한 이민자들이 만든 먹거리를 입에 물었다. 한국음식을 먹으려고 줄 선 유럽 사람을 보는 것도 신기하고 새로웠다. 베를린 젊은이들이 가득 찬 공원에선 노래자랑이 열리고 있었다. 이 도시는 누구를 위한 도시일까. 이 도시를 어떤 색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간만큼은 여기 모인 모두를 위한 도시 같다고 느껴졌다.

서베를린 숙소로 돌아오는 길, 도시의 중간중간 역사와 마주치는 것도 베를린 여행자의 몫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건물들은 역사 속 모습을 담고 있었다. 역사를 기억하고 간직한 현재가 베를린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역사를 온전히 안은채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는 도시. 수많은 이민자들과 베를리너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서베를린으로 돌아와서는 번쩍이는 도시의 네온사인 아래에서 학센에 맥주를 마셨다. 다른 유럽에서 누리지 못할 가격으로 감각적인 호텔을 만나는 것도 베를린에선 가능했다. 그렇게 매일 새로운 도시를 오가는 느낌으로 여행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베를린

오랜만에 느낀 새로움이었다. 일단 그토록 원하던 환경이 달라졌다. 예상했던 유럽 여행과도 달랐다. 유럽 여행이 아닌 베를린 여행이었다. 베를린은 그 누구도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는 도시였다. 십 년이 지나서 이탈리아 로마나, 영국 런던에 간다 해도 변함없는 풍경이 펼쳐지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을 도시였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뀌고, 그들이 도시의 모습을 바꾸고, 바뀐 도시가 다시 베를리너의 삶에 스며들고 있었다. 왜 가이드북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어떤 완벽한 가이드북도 이토록 역동적인 도시를 담아낼 수 없으리라.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 달이 넘도록 내가 예술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글이나, 그림, 사진, 도자기, 바느질, 패션, 요리 그게 뭐든... 나도 베를리너를 꿈꿨을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현실을 모르고 말하는 헛된 환상일지 모르겠지만, 베를린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 시작을 말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전과 다른 생기가 생겨났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똑같고 사는게 재미없다는 사람들에게 '베를린'에서 휴가를 보내보라고 말해준다. 당신이 예측할 수 없는 매력이 그곳엔 있다. 책을 읽어서도 알 수도 없고, 사진을 봐도 다 전달되지 않는다. 역사적인 베를린 장벽을 지나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는 다리에서 외칠지 모른다 "아니 이토록 매력적인 도시를 보았나" 지금 이 글이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우리의 우물에 던져진 아주 작고 새로운 '베를린'이라는 조약돌이 될 수 있길. 비바 베를린!  


+ 덧붙이는 글

호텔조차 감각적이고 새로웠던 베를린. 매일 똑같은 침대에서 눈뜨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공간

https://brunch.co.kr/@julyjoj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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