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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조던 May 27. 2018

나의 런던, 아빠의 런던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이 그리운 날

아빠를 기다리던 나, 나를 기다리게 된 아빠


어린 시절 아빠는 해외출장을 자주 가셨다. 아침마다 몇 밤만 더 자면 아빠가 오는지 엄마에게 확인하고 달력에 엑스표를 치며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가 돌아오셔서 커다란 가죽 트렁크를 여는 날이면 온 집안은 초흥분 상태였다. 아빠 혼자 그 많은 물건들을 대체 어떻게 가져온 것인지 참 불가사의하다. 지금이야 워낙 해외 물품을 구하기 쉽지만, 당시는 남대문 수입상가에서나 구매가 가능했다. 아빠는 당시 구하기 힘든 존슨즈베이비 로션, 파우더, 유아용 샴푸부터 시작해서, 물을 칠하면 물감이 되는 색연필과 노트, 레고와 우리가 좋아하는 공룡까지 가방에 담아오셨다. 그 와중에 엄마가 좋아하는 화가의 무거운 그림책도 잊지 않고 어깨가 짓이겨지도록 이고 오셨다. 그러니 아빠의 여행가방을 여는 날이면 신이 날 수밖에!


몇십 년의 시간이 흐르자 아빠는 더 이상 회사원이 아니었고 출장 갈 일도 없었다. 출장은커녕 해외여행도 쉽지 않아보였고 집에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반대로 나는 해외에 나갈 일이 많은 젊은 딸이 되어갔다. 내가 아빠를 기다리던 시간은 거꾸로 흘러 이젠 아빠가 해외여행 간 딸을 기다렸다. 하루하루 몸은 건강한지? 오늘은 재밌었는지 묻는 문자를 보내셨고 돌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리무진 버스 앞에 마중을 나와계셨다. 내 가방엔 아빠만큼 가족을 위한 선물이 들어있지도 않은데 아빠는 반갑게 마중을 나와주셨다. 내가 전부인 것처럼!


런던 여행을 떠나기 전 부모님 집에 들렀다. 여행 전 설렘으로 가득 찬 내게 아빠는 줄 것이 있다며 책을 몇 권을 내미셨다. 표지에서도 시간의 흔적이 느껴졌다. 대체 이런 책이 우리 집에 있었나 싶었다. 모두 런던에 대한 책이었다. 대영박물관 소장품 안내서도 있었고, 런던 그림책도 있었고, 미술관에 대한 책도 있었다. 지도와 책으로 이어지던 아빠 시대의 여행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시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렇게 무거운 책 없이도 앱이나 오디오 가이드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림이 아닌 핸드폰으로도 수십 장의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시대 아니던가. 나는 아빠가 내민 책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책 한권만 가져왔다.


런던에 대한 반응은 반반 좋거나, 싫거나


런던에 대한 반응은 반반이었다. 어설픈 중간 입장은 만나지 못했다. 좋거나 싫거나 극과 극이었다. 런던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 말했다. 지금도 당장 떠나고 싶다면서 꼭 뭘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런던에 들어서기만 해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속삭였다. 나머지 반은 물가가 비싸다. 날씨가 흐리고 여행 내내 비만 왔다. 도시가 우울하다. 음식도 맛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어느 쪽일까 궁금했다. 런던에 도착한 밤 타워브리지를 건너 맥주를 마시러 가는 순간 나는 런던을 좋아하는 50%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만 봤던 이 클래식한 다리를 건너 맥주를 마시러 간다니 '내가 런던에 다 왔네...' 싶었다.


다리를 넘어오자 정원을 거느린 조용한 영국식 동네가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마을 중간 펍의 문을 열였다. 쾅쾅쾅!! 터질듯한 록 음악이 귀에 요동을 쳤다. 맥주를 따르며 흔들흔들 거리는 사람들을 본 것 같았다. 반전되는 분위기에 놀라 문을 닫았다. 다시 고요한 마을의 정적이 흘렀다. 간판을 보니 내가 찾아온 맥주집이 맞았다. 문을 열면 음악과 맥주가 흐르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조용한 킹스맨 양복집 안의 비밀의 방처럼 말이다. 맥주를 마시고 취해서 얼굴색처럼 빨간 2층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난 런던을 좋아하는 50% 임이 확실했다.



여행자에게 친절한 6월의 런던

 

6월의 런던은 여행자에게 친절했다. 런던답게 비도 왔지만, 런던답지 않게 온화한 날씨와 파란 하늘, 흰 구름을 선물했다. 퀸메리 정원에 가기 위해 내린 역에서는 장미향기가 났다. 장미정원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오묘한 색의 분홍, 주황이라고 하기엔 더 여린 오렌지빛의 장미, 빨간 립스틱 같은 붉은 장미가 만발했다. 장미마다 just joey, ingrid bergman(영화배우 이름) 같은 근사한 이름을 달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우아한 장미향기에 취했다. 여왕의 나라다웠다. 해가지면 녹아내린 촛농이 역사를 말해주는 '고든 와인바'에서 브리치즈와 바게트를 두고 쉐리와인을 마셨다. 노천바 옆으로 템즈강이 흘렀다.


런던은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해리포터와 친구들이 마법학교로 떠나던 킹스크로스역 에서 기차를 탔다. 거대한 시계탑 빅벤 뒤로 메리포핀스가 우산을 들고 날아오를 것 같았다. 템즈강 다리 위로 어린 시절 아빠가 사다주신 장난감 같은 빨간 2층 버스가 지났다. 영화 주인공들이 잡아타던 클래식한 검은 택시도 여전했다. 주말에 포토벨로 마켓에 찾아가면 영화 '노팅힐'의 서점도 만날 수 있었다. 시장엔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휴그랜트가 있을 것 같았다. 주말엔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소년 마커스가 오리에게 딱딱한 빵을 던진 공원 호수를 돌았다. 유명한 비틀즈 음반 표지가 된 에비로드 건널목을 마치 존레논이 된 것처럼 건넜다. 언더그라운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역 어딘가에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도시는 현대와 과거가 아름답게 공존했다. 둥그런 곡선으로 휘어지는 피카디리 서커스를 지났고, 트라팔라 스퀘어에 가면 누구에나 개방된 미술관에서 무료로 고흐나 모네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버킹엄 궁전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지금도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세계 뮤지컬의 중심이 되는 웨스트엔드에서 매일 밤 오페라의 유령, 빌리 엘리엇 등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새롭게 문을 연 제이미 올리버 레스토랑의 음식을 맛보고, 런던을 주름잡는 몬무쓰 커피의 라떼를 마셨다. 세월이 느껴지는 목조 건물의 백화점 계단을 올랐고, 몇 단은 떼 오고 싶은 리버티천(꽃무늬 천)을 구경했다. 영국의 왕실 티 브랜드, 버버리, 폴스미스, 캐스키드슨부터 슈퍼마켓 막스 앤 스팬서를 둘러보는 것이나 골목 장터의 티스푼을 발견하는 것까지 재밌을 줄이야. 한 디자이너가 자신에게 가장 영감을 주는 곳으로  런던의 골목골목을 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래에서 기다린 과거의 런던

 

나는 그렇게 런던의 골목에 빠져 비행기 표까지 연기해가며 이틀을 더 머물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 여행의 기막힌 반전은 여행의 끝난 뒤 찾아왔다. 무심하게 툭 던져진 아빠의 그림책이 그 주인공이었다. 런던에 다녀오니 그제야 책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가 첫날 펍으로 가기 위해 건넜던 타워브릿지였다. 첫  페이지, 그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속에서 뜨거운 뭉클거림이 일었다. 책에는 내가 보고 느꼈던 런던이 통째로 들어있었다.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었다. 건물과, 공원, 광장, 시계탑, 궁전, 템즈강과 다리들, 노팅힐 마켓, 버스와 택시 런던 사람들까지 말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런던을 만들어냈고 그리움이 더해졌다. 대체 우리 아빠는 어디서 이런 그림책을 구해왔을까.


아빠는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아빠의 런던을 말이다. 몇십 년 전 아빠는 런던의 한 서점에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이 책을 샀겠지. 몇 권을 책을 뒤적이며 고르다 이 책으로 정했을 거다. 우리 집이 몇 번의 이사를 하는 와중에도 아빠는 이 책을 챙겼으리라. 당시 초등학생인 내가 커서 런던에 가게 되었고 그렇게 이 책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빠에게는 과거의 런던이지만 내게는 언젠가 만나게 될 미래의 런던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이 런던의 매력임을 증명하고 있다.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런 아빠 책들을 됐다고 물리고 온 나라는 딸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시간이 흘러 또 다시 런던을 가게 된다면 이젠 책 속 그림들이 생각날 것 같다. 그때도 변함없을 런던의 골목을 누비며 행복하리라. 그 시간까지 나의 아빠가 변함없이 내 곁에 머물러주길 간절히 바란다.


'Andrew murray loves London. he looks upon its buildings with a joy that leaps out of his painting. page after page of fun and delight in a wonderful city make this collection a most endearing and enduring of armchair tours.'


PICCADILLY CIRCUS
BUCKINGHAM PALACE
TRAFALGAR SQUARE
STREET MARKET, PORTOBELLO ROAD
TOWER BRIDGE
BIG BEN


** 그림 출처: ANDREW MURRAY'S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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