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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조던 Feb 21. 2017

비포 미드나잇 in 그리스

우리가 찾아왔어요, 사랑의 시작과 끝을 향해서요

여행의 시작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떤 여행은 그저 그곳을 가 보기만 하는 것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비포 시리즈를 회상해보자,

비포 선라이즈(1995년) 비포 선셋 (2004년), 비포 미드나잇(2013년) 감독과 배우들은 저 긴 시간을 담아가며 영화를 완성시켜냈다. 보통은 한 편의 영화 속에 시작과 끝이 모두 담기기 마련인데 비포 시리즈의 끝은 좀 달랐다. 늘 다시 시작 같은 끝이었다. 비엔나에서 헤어진 그들이 다시 만났을지 궁금했고, 9년 만의 파리에서의 재회 후 제시는 셀린을 두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을지 궁금했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들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2013년 정말 마지막 편 비포 미드나잇이 나왔고, 결론은 결국 제시와 셀린은 함께라는 것이었다. 무려 신들의 땅 그리스에서 말이다. 신이 내린 운명의 시험을 잘 통과한 건지 아니면 정말 신이 맺어준 특별한 인연이었던 것인지 여하튼 둘은 긴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 함께였다. 진심으로 기뻤다. 그리고 결국 둘이라서 안도했다. 그래 결국은 그 끝에서 제시와 셀린은 함께였구나! 둘이었구나!


풋풋했던 젊은 모습은 없지만 역시 이 두사람은 함께여서 완벽하다


그런 비포 미드나잇의 도시, 그리스 '카르다밀리(kardamyli)'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쌍둥이 딸을 둔 가족 제시와 셀린의 모습을 볼 수 있던 곳, 나를 사랑해주고 이 영화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그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직 그곳을 가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한 여행으로-


그리스까지 한 번에 가는 직항도 없었거니와 카르다밀리라는 마을은 국내 여행자들의 리뷰나 정보도 전무했다(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그때보단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을 것 같기도 하다), 구글을 통해서 있는 정보와 마을까지 가는 동선을 파악했다. 우리의 경로는 (비행기로 인천 -> 아테네 -> 버스로 칼라마타 -> 렌트로 카르다밀리) 였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뮌헨을 거쳐 깜깜한 밤 아테네로 입성했다. 푹 자고 다음날 아침 아테네 버스터미널로 이동해 3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 소도시 칼라마타를 찾아갔다.

안녕, 오렌지 빛 항구 도시 칼라마타

칼라마타 터미널에 내려서 목적지 카르다밀리까지 타고 갈 렌터카를 구해야 했다. 영어가 안 통하는 택시 기사님들이 모여 계셨고, 그중 가장 푸근해 보이는 기사님과 손짓 발짓으로 AVIS 매장 앞에 도착했다. 기사님은 우리에게 택시 안에 잠시 있으라 하고 내리시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전화를 걸기 시작하셨다. 알고 보니 지금은 점심 후 시에스타(낮잠시간) 시간으로 가게가 문을 닫았던 것이다. 차마 우리를 두고 가지 못했던 착한 기사님은 AVIS 직원분을 전화로 호출해주셨다.


영어에 능숙한 렌터카 직원분이 우리 앞에 섰다. 젠틀하고 깔끔하신 모습처럼 일도 착착 처리해주시더니 지금은 시에스타 시간이라 렌터카가 오려면 저녁 5시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난감해하신다. 점심을 먹었냐고 묻더니 밥이라도 먹고 오라며 칼라마타 맛집을 추천해주시다가 본인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가자고 하셨다. 준비 없이 터미널에 내리기만 했는데 그리스인들의 도움으로 일이 하나씩 풀리는 게 신기하고 고맙기만 했다. 본인도 자주 가는 좋아하는 식당이라며 우리를 내려주셨다. 우선 이 도시부터 지내는 동안 한국인은커녕 단 한 명의 동양인도 만나지 못했다.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낯선 마을인데 원래 알던 동네 식당처럼 편안했다. 시에스타 타임,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와인도 한 잔 하고!

 

렌트카 직원분이 데려다 주신 식당. 저 의자가 고흐의 그림 속 의자를 닮았다 생각했다
정말 신선하고 맛있었 던 그리스식 샐러드, 집에와서 따라해도 이 맛이 나지 않았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 속 카르다밀리로 떠날 시간이야!

밥도 먹었겠다 차도 받았겠다 한 시간 정도 달려 목적지 카르다밀리에 도착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다한 미션만 남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해가 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내 짙은 어둠이 찾아왔고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마치 대관령 고개 같은 구불구불한 절벽길이었다. 옆에는 낭떠러지, 그리고 바다. 그리고 가로등 하나 없는 그 칠흑 같은 깜깜함을 뚫어야 했다. 길도 낯설고 운전도 어색하고 정말 식은땀이 줄줄, 한 명은 구글맵으로 네비를 해주고, 한 명은 조심조심 살금살금 운전을 하며 겨우 산을 넘어 파김치가 된 채 숙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다시 돌아올 땐 낮에 왔는데 그 길이 정말 완만한 동산처럼 느껴졌다. 밤과 초행길이라는 두려움의 시너지가 같은 길을 얼마나 다른 길로 느껴지게 하는지 체험했던 순간)


숙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인아저씨가 두 팔 벌리며 뛰어나오셨다. 꼭 그리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시다. 푸근한 몸집과 곱슬머리 선이 굵은 얼굴이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그리스인처럼 생긴 주인아저씨. 나도 모르게 아저씨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는 길이 너무 어둡고 너무 힘들었어요'라는 토로가 절로 나왔다. 그때 아저씨가 해주신 말이 너무 기억에 남는다.


'Tomorrow is another day, you will feel better'

그리고 정말 아저씨 말대로 다음날은 모든 게 달라졌다.


숙소: katikies manis kardamyli

늦은 밤 주황 불 빛 속으로 들어갈 때 참 따뜻했는데, 특히 저 꽃을 말려 만든 전등이 가장 맘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저 멀리 아치형 창문이 푸른 새벽으로 물들고 있었다. 창문 밖 풍경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어젯밤 어둠 속에서 보지 못했던 카르다밀리 속살이 한눈에 펼쳐졌다. 와! 이런 곳이었어?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돌집, 바다, 지붕, 영화 속 그 느낌 그대로야
밤에는 몰랐다, 이런 바다가 펼쳐져 있을 거란 것을
카르다밀리에서 맞이하는 새벽
숙소 아래 에단호크가 쌍둥이 딸과 수영할 것 같은


정말 이 곳에 도착했구나라는 생각이 아침이 돼서야 들었다.

사랑하는 영화 속 배경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 먼길을 찾아오다니 무엇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인가란 생각도 들었다. 특별히 영화 속 어떤 장면을, 또 주인공이 함께 하던 그곳을 찾아가는 것에 집착할 법도 했으나 이 도시는 그냥 찾아온 것 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카르다밀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치형 문을 열고 고양이가 있나 찾아보고, 신선한 오렌지로 짠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갑자기 길을 가다 수영하고 싶어 지면, 후딱 수영복을 입고 10월임에도 바다로 풍덩 들어가기도 하고, 그러다 옆동네 스투파 비치에 놀러 가고, 비치 끝에 있는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문어 요리를 먹었다. 돌아오는 길 마트에서 요거트와 소시지를 장 봐서 돌아왔고 해지는 저녁 즈음엔 불 켜진 작은 동네로 다시 나가 수공예 품을 구경했다. 마을이 정말 예뻤다. 주황색 불 빛이 기억나고 견고한 돌집들이 기억난다.


카르다밀리의 생활

아침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오늘도 냥이가 저 자리에 있을까? 창문 밖을 보게 된다. 문을 여는 순간 이 틈을 놓칠새라 재빠르게 방안으로 진입하는 고양이를 만나면 드디어 오늘 하루도 시작.


마을 식당으로 나가서 싱싱한 오렌지 주스와 그릭 샐러드로 아침 식사를 한다. 정말 조용하고 평화롭다.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동네를 걷다 보면 멍멍이와 수다 떠는 동네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그리스 답게 올리브유를 파는 가게도 있는데 안 밖으로 희고 예쁨이란.


꽃나무 아래서 예쁜 벤치를 만나고
장난감같은 노란 예배당도 만난다
투명한 바다를 만나는 순간 들어가야하나!! 10월인데?
저 투명함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소녀를 따라 들어가게 되고
결국 물에 젖은 옷과 신발을 말리게 된다
옆동네 스투파 비치로 놀러를 나갔다.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이런 일상을 꿈꿔본다.
배가 고프면 스투파 비치 끝에 있는 최고의 맛집에서 문어요리와 와인을 마신다. 한눈에 이 식당이 보일거다.
그리고 우리도 비포 미드나잇의 그들처럼 노을을 바라본다 still there still there라고 셀린처럼 말하면서
영화 속 한 장면,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제시와 셀린 (출처: 비포 미드나잇 보도스틸)
밤이되면 동네로 돌아와 작은 가게의 불 빛을 따라 구경을 다닌다. 맥주도 한 잔 하고!


우리는 길고 힘든 여정을 거쳐 카르다밀리를 찾아와 가장 쉽고 편한 생활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특별히 어떤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꼭 무언가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딱 하나의 소망이 있었다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still there still there라고 읊조리다가 해가지면 gone이라고 나지막이 말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다. 충분한 여행이었다. 때론 그곳을 가보기만 하는 것으로 완벽한 여행이 있는 법이고 이곳이 그러했다.


카르다밀리 우리가 찾아왔어요!

사랑의 시작과 끝을 향해서요

계속 거기 있어만 줄래요?

still there still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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