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밤이 좋았다. 그곳의 차가움이 좋았다. 내가 산크리스토발을 좋아하게 된 것에는 선선한 날씨 때문이 컸다. 멕시코 대부분의 도시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려면 더위에 강해야 했다. 여행하는 동안 스스로 '씨에스타(Siesta)'를 터득하고 하루를 둘로 쪼개 생활했던 것에는 아마도 내게 더위를 참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크리스토발은 높은 고도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 덥지 않은 곳이었다. 전후에 와하까와 깜페체에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온도 그래프가 뚝 떨어진, 나에겐 숨구멍 같은 곳이었다. 기승을 부리던 고온이 잠잠해지니 내 안에 묵직한 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던 스트레스가 슬그머니 걷히는 것 같았다. 모르는 새 아침이슬이 살포시 내려앉듯,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서였을까? 밤이면 으레 신경이 곤두서는 멕시코의 거리지만, 이곳에선 아무 생각없이 걸어서 호스텔로 귀가하곤했다. 해가 지고 밤이 오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저 하루가 이만 물러가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개, 풍선 장수, 솜사탕 장수가 있는 넓은 광장에서 혼자 노을 사진을 찍다가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늦게 깨닫는다. 멀리 있는 풍경에만 시선을 두다가 렌즈 바로 앞의 사람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ㅡ앗, 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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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눕다
산과 집의 실루엣 주변으로 노을빛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도 어김없이 일몰의 시간이 다가왔다. 앞으로의 남은 여행 동안 나는 얼마나 더 많은 노을을 볼 수 있을까.
방관자처럼 광장에 서 있노라니, 구름은해먹처럼 노곤하게 떠다니고 빛무리들은 가로로 기다랗게 누워 있었다. 그 한갓진 모습이 이 마을을 닮아 있었다. 거리마다 낮은 집들이 주줄이 늘어선 마을, San Cristóbal de Las Casas. 석양마저 편히 누이는 마을. 이 빛이 나를 훑고 지나면 나에게도 평온한 밤이 찾아오겠지.
집과 산과 구름 위에 노을이 스르르 들어와 눕는 모양새를 보다 생각한다. ㅡ아, 내가 풍경 속에 들어가 노을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나도 이미 한 층의 빛무리로 물들어 가고 있었구나.
긴 밤을 버틸 수 있는 온기를 전해주고 가려는 듯, 작은 마을에 온통 붉은 옷을 입혀주고 떠나는 노을. 바야흐로 이곳에서의 셋째 밤, 마지막 밤이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ㅡ추운 저녁이었지만요, 저는 늘 따뜻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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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성당에서의
침묵
Iglesia de Santa Lucía, San Cristóbal de Las Casas, Chiapas, México.
산크리스토발에 처음 도착했을 때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며 봤던 하늘색 성당, 그 단 몇 초만으로도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마지막 날 오전, 나는 걸어서 이곳으로 찾아왔다. 이 마을에서 보는 4번째 성당이었다.
산크리스토발에서 본 나머지 3군데 성당
시야에 성당이 들어오는 순간, 종교 유무를 떠나 누구나 한눈에 반할 것 같은 그림 같은 하늘색을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 날은 내가 그동안 카메라를 꽤 잊고 다녔다는 걸 깨닫고 아쉬워서 늦게나마 사진을 찍으려 했던 날이었다.
나는 이곳의 신비로운 색감에 정신을 빼앗겨 눈에 보이는 것들을 열심히 카메라로 옮겨 담고 있었다. 그러다 렌즈 속 세상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다름 아니라 내가 담은 풍경 속의 기도하는 여인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진을……
행여나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까, 멕시코 친구들이 성당에서 미사 시간에 내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고 했을 때도 요란한 여행자가 되기 싫어 스스로 엄숙한 분위기를 지켰던 나인데. 미안한 마음에 괜히 옷깃을 다시 여미고 있었다.
사진 속 묘연의 여인은 카메라 셔터 소리보다 더 작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아주 우연히 어깨를 약간 들썩이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그냥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감히 계속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ㅡ마음에 남모르는 슬픔이 일 때면 사람들은 이곳에 오는 걸까. 성당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더 파랗게 보이는 걸까.
산크리스토발에서의 마지막 장소, 산타루시아 성당은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는 곳이었다. 밀려오는 뜨거움 같은 것도 결국엔 다 가라앉는 거라고, 괜찮다고, 차분한 어조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