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Campeche#2

by 세라

깜페체가 '설렘'이라고? 첫날의 나였다면, 그런 결론에 이르리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 '깜페체는 □□다' 를 채워넣으라고 했다면 아마 '깜페체는 덥다' 또는 '깜페체는 작다'를 써넣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도 파스텔 톤의 거리는 정말 예뻤지만, 무척 덥고 피곤했고, 도시는 너무 작아 3일이나 있기로 한 것에 대해 회의가 들 지경이었다. Puebla에 처음 내렸을 때 느꼈던 막막함과 비슷하달까. 그때도 장시간 이동 끝에 도착한 도시여서 처음엔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깜페체 도착


San cristobal de las casas에서 Palenque-Merida-Chichen itza로 가는 루트를 포기하고 곧장 이곳 Campeche로 왔다. 야간 버스를 타고 밤새 달려 도착했지만, 아직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호텔에서는 1층에 있는 공간에서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짐만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바닷가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깜페체 바다는 깐꾼처럼 해수욕을 할 수 있는 해변이 아니라, 로드무비에 어울릴 법한 무던히도 한적한 바닷가였다. 길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 많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더위가 온전히 나를 향해 습격해 오는 느낌이었다.


ㅡ와아아, 이게 바로 유카탄 반도의 더위구나.


지금까지 '덥다'는 말을 100번은 쓴 것 같지만, 솔직히 '진짜 더위'는 여기부터였다. 햇빛은 밝다 못해 새하얬고, 피부의 숨구멍마다 습기가 진득하게 스며들었다. 이러다 잘못하면 일사병에 걸리겠구나 싶었다.



아무도 없는 길 위, 말 없는 더위만이 유유히 나의 유카탄 반 입성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끝없는 길, 금방 액체로 맺혀버리는 무거운 습기, 야간 버스의 피로, 오늘따라 왠지 더 외롭고 갈 곳 없게 느껴지는 신세! 바다 위의 여백조차 너무도 무미건조하여 야속하게 느껴졌다. 더워지면 넋을 놓아버리는 나는, 점점 임계치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안 되겠다, 시원한 커피라도 한 잔 해야겠다.



무엇을 해야 하나


성당이 있는 깜페체의 센뜨로 쪽으로 가서 눈에 들어온 까페떼리아에 바로 들어갔다. 역시 이곳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었지만, 늘 그랬듯 얼음을 따로 받았다. (이렇게 더운 멕시코에 아이스커피가 없다는 것도 이상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와이파이에 연결해서 갈만한 곳을 검색해 보고, 근처 2시간 거리의 Ciudad Carmen에 사는 멕시코 친구 페르에게도 연락을 했다. 페르와는 며칠 뒤 Playa del Carmen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안부만 주고받았다. 그런데 내가 검색해본 바로도, 그녀가 알려준 바로도, 가볼만한 곳이 성벽(Muralla)밖에 없어 보였다. 성벽은 걸어서 10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호텔에서 바닷가 쪽으로 5분이면 바다, 시내 쪽으로 10분이면 센뜨로와 번화가, 시장, 상점이 다 있었다. 뭐지 이거, 산크리스토발이나 과나후아또도 작은 도시였는데 여긴 더 작잖아? 무턱대고 2박 3일이나 있기로 했는데, 어딜 가야 하는 거지.



깜페체는 사실 루트상 애매한 위치에 있어 보통 많은 사람들이 생략하거나, 잠시 당일치기로 들르는 곳이다. 그런데 워낙 도시가 작다 보니 3일 동안 있는다고 해도 반나절보다 딱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콜로니얼 거리 구경도 잠시 오후로 미루고 우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더위와 피로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씨에스타


드디어 체크인 완료! 벨보이가 2층까지 캐리어를 들어줬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팁을 원하는 눈치였다. 호스텔만 이용하던 나는 약간 당황해서, 나올 때 줄 요량으로 일단 모른 척했다. (벨보이에게는 얼마를 줘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공항 노숙, 친구 집, 호스텔 도미토리 등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최대한 숙박 비용을 아꼈지만, 깜페체에서부터는 중저가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빅픽처(?)의 일부였다. 여행의 막바지에 편하게 있기 위해 숙박 비용을 뒤쪽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유카탄 반도의 더위는 막연했던 계획을 '선명지명'으로 탈바꿈시켜주었다. 더위에 옴쭉도 하기 싫을 땐 편하게 축 늘어져 있을 장소가 필요한 법. 나의 첫 호텔 방이 된 이곳은 한 명이 쓰기에 충분히 넓고 만족스러웠다.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생긴 거대한 천장 선풍기와 에어컨으로 얼음방(?)으로 만든 뒤 늘어져 있으니 도미토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천국이 펼쳐졌다.



깜페체의 성벽


가장 더운 시간에 잠시 낮잠을 자고, 오후에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섰다. 깜페체는 특정 거리만 꾸며져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거리가 예쁘고 깨끗했다. 깜페체는 계획 도시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거리의 개성과 색채에 감탄하며 한쪽 방향으로 쭉 걸어가다 보니 성벽과 시장이 나왔다.



깜페체는 예로부터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상업이 번영했다고 한다. 특히 천을 붉게 물들이는데(천연염색) 필요한 Palo de Campeche라는 나무의 수요가 높았는데, 이때문에 해적이 자주 침입했다고 한다. 깜페체 사람들은 배를 만들고 선원을 키웠지만, 해적이 자꾸 침입해 약탈과 학살을 일삼아 결국 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세웠다고 한다.


La muralla = 성벽
La pirata = 해적


성벽은 깜페체의 가장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도시 전체가 바다을 따라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여러 건축물들이 방어적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요새 도시'라고도 불린다.



나는 성벽을 지나 뒤편까지 혼자 설레설레 걸어가 보았다. 그 뒤에는 조그만 공원과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별로 깨끗하지 않아서 딱히 일부러 찾아가 볼 만한 곳은 아니었다.



바로크 양식의 콜로니얼 거리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깜페체 거리의 색감에 비하면, 성벽이나 시장엔 큰 매력이 없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콜로니얼 거리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집과 거리들은 그 컬러풀한 멕시코에서조차 유일무이한, 다른 어느 도시에도 없는 특별한 색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자체로도 너무 예뻐서 나는 마다 펼쳐지는 일러스트같은 풍경들을 음미하며 혼자 거리를 탐험했다. 그러다 적당한 레스토랑이 보이면 들어갈 생각이었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거리를 걸으며 기분이 슬그머니 좋아질 때 즈음, 깜페체에서의 설레는 일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어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