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숲속을 걷다

by 세라


나뭇잎이 아니었다. 'El parásito', 기생식물이라 했다.


멕시코 중부 고원지대의 깊은 숲 속, 사방에 하얗게 샌 머리 같은 이파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줄기들을 헤치고 걸으며 마치 이세계의 숲 속을 지나고 있는 듯했다. 가만히 서서 보면 바람에 잘랑잘랑 흔들리며 하얗게 빛이 났다. 신비롭다ㅡ 저런 생명이 있을 수가 있구나.


ㅡAbraham, 이게 뭐야? 이 나무는 이름이 뭐야?

ㅡ그건 나무가 아니야.

ㅡ그럼 뭔데?

ㅡ기생식물이야.


함께 있던 멕시코 친구가 하얀 줄기들의 정체가 본신의 이파리가 아니라 기생하는 식물이라고 했다. 기생 식물, 다른 숙주에 의지해 살아가는 생명. 그게 사실이라면, 저 나무는 완전히 정복당한 거네.



기생 식물이라면 남의 영양분이나 축내고 살아가는, 대부분 망측하게 생긴 것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 순간만큼 나는 그저 자연이 자아내는 기묘한 분위기에 홀려 있었던 것 같다. 며칠간 앓다가 일어나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일까. 기생 식물들이 숙주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니. Huasca de Ocampo에서 많은 것들을 봤지만 지나는 길에 봤던 하얀 숲 속 풍경이 왜인지 기억 속에 멈추어 있다.




이날의

기록



Pachuca에서 혼자 앓으며 며칠간 식욕도 없고 운신도 하지 못하는 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하루, 친구 Abraham을 따라 Huasca de Ocampo에 가게 되었다. 아브라암은 이전 멕시코 여행에서 친해졌던 친구다. Campeche에서 처음 만났으며 멕시코시티에서 일하는 직장인으로 나랑 동갑이다. 그런데 우연히 아브라암의 고향이 Pachuca인 걸 알게 되었고, 우리는 생각지 못하게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와준 아브라암이 고마웠다.


Huasca de Ocampo는 거대한 주상절리가 있는 공원으로,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한 휴양 관광지다.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곳이지만 간신히 회복기에 접어든 나에게 적당한 장소였고, 가는 길에 환승을 여러 번 해야 했지만 아브라암이 다 안내해 주었으므로 마음 편히 갈 수 있었다.



아브라암은 자기가 어릴 적부터 다녔던 가게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소개시켜 준다며 환승하는 길에 있는 마을에 들러 점심을 사 주었지만, 아직 몸을 다 회복하지 못한 나는 정말 입맛이 돋지 않았다. 그는 내가 남긴 것까지 다 먹어주고도 한번 더 시켜 먹었다. 음식 남기는 법은 절대 없는 나인데, 너무 많이 남겨 민망했고 미안했다. 며칠간 곯은 배에 기름기 가득한 수프와 퍽퍽한 고깃살들은 정말이지 들어가지 않았고,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상적인 컨디션이었다면 누구보다 잘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래도 아브라암에게 지금은 컨디션 때문에 많이 안 들어가지만 음식은 맛있다고 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보여주겠다던 아브라암의 설레는 눈빛을 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해 주리라.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걸 아는 아브라암은 가는 길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었다. 마을에 있던 성당과 엄청나게 큰 빵 등등.



Huasca de Ocampo는 예상한 것보다 멀었다. 꼼비를 세 번인가 네 번인가 갈아타면서 귀가 먹먹해지도록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도착했다.


@Prismas Basalticos (주상절리)


주상절리공원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거대한 규모일 줄은 몰랐다. 투박하고도 위엄 있는 아메리카 자연 특유의 멋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이곳이 오염되고 냄새난다는 걸 읽은 적이 있어서 처음부터 제외했는데, 아브라암과 함께 와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고, 의외의 힐링 코스였다.



주상절리 공원 근처에는 꼼비를 타면 이동할 수 있는 여러 자연공원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 Bosque de las Truchas san miguel regla로 갔다. 산책 코스는 물론 수상 레포츠와 음식점, 기념품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이 일대 전체가 이런 자연공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보통 에코 투어 코스로 소개된다. 조금은 심심할 수도 있지만 생각 없이 자연 속을 천천히 걸어다니기엔 딱 좋은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 서로 오늘 가장 좋았던 것을 꼽았을 때 나는 근래 들어 처음으로 상쾌함을 느꼈던 숲 산책을 꼽았는데, 아브라암은 배불리 먹었던 점심을 꼽았다. 둘 다 메인 코스는 아니어서 외였다. 아브라암은 비록 내가 함께 맛있게 먹어주진 못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시장기'까지 더해져서 주변 상황 같은 것은 대수가 아니었나 보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들의 이름을 묻고 배워갈 때는 모든 세계가 새롭고 궁금한 아기가 된 것 같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일상으로 돌아와 반복적인 삶을 이어가다 보면, 기억들은 장기기억보관소로 넘어가고 어떤 경험들은 생각지 못한 순간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의식 어딘가가 새롭게 확장되고 일상이 남모르게 풍성해진다. 이날 만난 하얀 풍경들이 무의식의 어느 회로를 타고 나타나 가끔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여행지에서의 감정과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자라나 보다. 마치 숙주보다 더 아름다운 기생식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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