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작은 책방이었다-1

#께레따로에서 만난 친구

by 세라


께레따로(Querétaro). 돌아가고 싶은 멕시코 도시들 중 하나. 여행을 하며 어떤 도시를 얼마나 많이 기억하게 되느냐는 어쩌면 얼마나 많은 우연이 일어났느냐에 달린 건지도 모른다. 내게 께레따로는 그런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세어 보니 횟수로만 5번이나 만났는데, 짧게 머물다 가는 여행자의 우연치곤 차라리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Cuando te vi por primera vez, no creí que te hubiera importado mucho


그와의 첫 만남이 의미를 가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의 인연은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우리를 찾아들었다.




첫 번째 만남


그를 처음 만난 건 께레따로의 작은 책방이었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하루 종일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날이었고, 저녁때쯤이 돼서야 그의 존재를 자각할 때쯤에도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었다.



께레따로에 도착한 날, 감기 때문에 일정이 꼬여 버린 바람에 이곳에서도 딱히 계획이 없었다. 숙소에는 여행 팸플릿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종이 위의 낯선 축적만으론 감이 서지 않았다. 우선 지도를 대충 훑어본 뒤 가방에 챙기고 밖으로 나가 보니 가까운 곳에 시티투어 버스가 보였다. 마침 바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Parque Independencia / 이 앞에서 시티투어 버스가 출발한다.


약 1시간 동안 주요 장소들을 간단하게 돌아보며 께레따로라는 도시와 첫인사를 나누었다. 느낌이 좋았다. 솜빛 하늘이 따뜻한 볕이 고루 내린 거리들을 감싸 안고 있었고, 나도 구름처럼 한 차원 떠오른 기분으로 도시를 걸어 다녔다. 투어 버스 안에서 보이는 께레따로의 골목들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아기자기했다.



시티 투어가 끝난 뒤 혼자 버스 안에서 봤던 마음에 든 골목들을 걸어 다니며 갤러리와 성당도 들어가 보고, 정원에 앉아 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금세 저녁 시간이 되어 길을 나섰는데, 마침 한 서점을 발견했다. 사실 서점이라기보단, 책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조금 큰 서재 같은 곳이었다.



나는 책방에서 한 시간 정도 보냈는데, 사실 생각보다 볼 수 있는 책이 많이 없었다. 멕시코의 다른 도시에선 그런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입구 사물함에 모든 짐을 맡기고 번호패를 받 들어가는 시스템이었고 대부분의 책들이 비닐로 싸여 있어서 내용을 볼 수 없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중 볼 수 있는 책들을 세세히 살펴보며, 내가 당시 좋아했던 영화 코코가 소설책으로 나온 것을 발견하고 고민 끝에 그 책을 샀다. 책은 3가지 버전이 있었는데 너무 쉬워 보이는 어린이용과 너무 길어 보이는 책의 중간 정도 되는, 심심하게 삽입된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고 적당한 수준으로 보이는 책으로 결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인연이 이곳에서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금은 친구가 된 그는, 책을 계산해 준 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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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만남


책을 사고 나온 뒤, 목적지였던 식당에 갔으나 대기줄이 너무 길어 포기하고 말았다.(결국에 나중에 다시 갔지만) 호스트가 추천해 준 단골 식당이었는데, 로컬맛집이었는지 손님이 너무 많았다. 혼자서는 많이 시키지도 못할 테고 금방 나와야 텐데, 긴 줄을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근처를 걷다 누가 봐도 관광객들만 가는 레스토랑을 보이는 곳에 들어가 버렸다.


@Enchiladas queretanas


오전부터 겨우 감기가 회복세에 돌입했음에도 기분을 내고 싶어 맥주도 한잔 시켰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센뜨로에는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고, 숙소도 가까이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실제로 께레따로는 멕시코 안에서는 치안이 좋기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특별히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멕시코에 온 뒤 기운을 차리고 가장 여행자답게 돌아다닌 하루였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께레따로의 분위기를 만끽하다 숙소로 향했다. Jardín Zenea 근처에서 코너를 도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와 딱 눈이 마주쳤다. 순간 둘 다 "엇!"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책방에서 책을 계산해 줬던 남자였다. 낮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얼굴을 보는 순간 기억이 났다.


ㅡ엇, 너는 아까 그 책방에 그?


마성 같은 기묘한 미시감, 인연이란 그런 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일까.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서로 제대로 눈을 마주친 적 있다면, 내가 자각하기도 전에 기억 저장소엔 이미 상대방의 데이터가 '등록 완료'된다. 반나절만에 장기 기억 저장소로 넘어갈 뻔한 그의 데이터를 끄집어냈다. 기억이 생생해졌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짧게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게 됐다. ㅡ그의 이름, 지오반니.(Giov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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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만남



며칠 뒤, 나는 혼자 근교 마을인 Peña De Bernal에 다녀왔다. 다시 께레따로로 돌아올 때쯤 5시쯤이었고, 지오반니와 7시 반에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무더운 날씨에 낯선 마을을 끝없이 걷다 돌아가는 버스를 탔을 때쯤엔,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안정감이 스몄다. Peña De Bernal에서 시간이 애매해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해 몹시 배가 고팠지만, 그래도 지오와 맛있는 걸 먹으러 갈 생각을 하며 허기를 참았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미리 나가 공원에서 그를 기다렸다.


@Jardín Zenea / 약속을 기다리며


그런데, 지오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메신저에 답조차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그를 기다리다 결국 날이 저물어 버리자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ㅡ속은 건가?


약속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는 멕시코 문화를 감안해도 이건 너무한 것이었다. 2시간 정도 지나고 나니 그동안 감기로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울분까지 함께 폭발해 버렸다. 어느새 어두운 밤이 되었고, 빛나는 정원을 혼자 걸었다. 떨어지는 온도만큼 기분도 싸늘해졌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저녁을 먹고 싶었지만, 어느 식당도 고르지 못해 시내를 두 바퀴나 돌았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지오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안하다며 구구절절한 변명을 담은 11개의 메시지와 함께. 그때가 이미 10시 반이었다.


@Jardín constitución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Jardín constitución의 벤치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데 고개를 드니 눈 앞에 지오반니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잦아드는 약간의 안도와 반가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3시간이나 늦을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버스를 타려고 나왔는데 현금이 없었고, 현금을 가지러 다시 가야 했고, 폰이 갑자기 꺼졌고, 등등) 게다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미안해하긴 했지만, 근처 펍에서 록 음악이 흘러나오자 사과는 한 번으로 끝이라는 듯 큰 소리로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 아닌가.


ㅡ뭐지? 이 이상한 상황은?


우주 최강의 황당함이 치솟는 와중에, 오히려 내가 그에게 사과를 받아내려고 부득부득 매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늦었냐, 뭐 때문이냐, 그게 몇 시간 걸렸냐, 전화는 왜 안 받았냐, 하며 캐물은 건 다 나였다.


그래도 어쨌든 늦게나마 나를 찾아온 그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사실 멕시코 사람들이 약속을 안 지켜서 손해 봤던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 축적된 괘씸함이 터져 나온 것도 있었다. 이왕이면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가는 편이 낫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굳어버린 표정을 펴려고 노력했다.



조금씩 감정들이 가라앉자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대뜸 난 배고프다고 말했다. ¡Tengo hambre! 그와 함께 한 가게에 들어가 또르따를 시켜먹었다. 으슬해진 몸에 금세 온기가 스며들었다. 따뜻해진 채 나무줄기처럼 이어지는 골목들을 계속 걷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어느새 우리는 같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책방에 갔을 때 책 내부를 볼 수 없게 되어 있어 아쉬웠다고 했더니, 자기한테 말했으면 언제든지 열어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 그런 거였구나, 몰랐어, 이런 대화가 오갔다.



지오는 내가 혼자서는 절대 알아내지 못했을 지름길들을 피터팬의 그림자처럼 리드미컬하게 건너 다녔다. 어떤 막다른 곳이라도 망설임이 없었다. 우리는 왁자지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에 들어갔다. 그의 소개로 Pulque(뿔께)라는 이달고 주의 전통주도 맛보았다. 데낄라처럼 선인장 증류주지만, 약한 도수에 다양한 과일즙이 가미된 달콤하고 가벼운 술이었다. 누군가 무슨 맛의 뿔께을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Maracuyá라고 대답하기로 정한 것이 이날 밤이었다.


나의 숙소는 바에서 두 블록 정도 거리에 있었고, 밤이 깊어져 지오가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쉬운 작별, 짧지만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이 스쳤던 만남이었다. 나를 화나게 하고 웃게 했던, 께레따로의 지오반니를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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