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크리스토발의 소피아

"담배는 자연이 준 선물이야!"

by 세라

워킹 투어를 시켜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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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San Cristóbal de Las Casas)'는 멕시코 여행 중 내가 가장 편안하게 보낸 마을이었다. 거리에 온갖 컬러가 펼쳐져 있는 데도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에 가까운 곳, 아이들과 개, 풍선 장수, 솜사탕 장수가 광장을 오가는 곳, 또 그들을 풍경인 양 바라보는 풍경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은 여행하지 않고도 여행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산책 수준의 마을 탐방만 하며, 재래시장에서 재료를 사 와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물가도 무척 저렴했다. 원하는 대로 양파, 당근, 감자 하나씩 골라서 600원, 귤 15개에 600원, 키위 5개에 1200원이었다.


나는 장기여행자도 아니면서 아침마다 요리에 열중하며 '호스텔콕'하는 조금 특이한 동양인이었고, 덕분에 호스텔 직원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어느 날, '소피아'라는 직원이 매일 오전 10시마다 워킹 투어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시간을 놓친 뒤였고, 내가 아쉬운 기미를 보이자 소피아는 3시에 퇴근하는데 그때 원하면 개인적으로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또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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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엉뚱했다. 우리는 멀리 보이는 노란 과달루페를 향해 걸어갔는데, 교회 이름을 물어보니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응? 알고 데려가는 거.. 아니었어?(철렁)


알고 보니 소피아는 호스텔에서 일한 지 4일밖에 안 됐고, 고향은 저 멀리 멕시코시티라고 한다. 과나후아또에서 만난 엘사처럼 고향을 떠나 자기가 좋아하는 도시에 살러 온 것이었다. 시골에서 대도시로 가는 게 아닌, 대도시에서 시골로 가서 원하는 삶을 개척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같이 여행 온 친구처럼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방심하지 말자, 아자 아자!)


RmJsXERyBkrNFN0kZRuCgNjBM-k.jpg Iglesia de Guadalupe.


그녀는 길치였다. 나도 길치 오브 길치인지라 최대한 겸손하게 있으려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는 기본적인 방향 감각조차 심각해 보였다. 어느새 내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래, 워킹 투어는 내가 시켜주마. 그 와중에 소피아가 자꾸 "걱정 마, 걱정 마"라고 말했다. 나는 소피아가 그러든 말든 그대로 두었다. 소피아는 자기 자취방을 찾아가는 데도 비슷한 골목에서 몇 번이나 헷갈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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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타투


소피아는 자기 자취방 건물에 있는 아로마샵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 며칠 사이에 어떻게 아로마샵 주인과 친해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닫혀 있는 가게의 열쇠까지 주고받는 사이였다. (겪어도 겪어도 적응이 안 되는 멕시코라는 신비한 나라!)


아로마샵을 구경하던 중에, 그녀가 나에게 담배를 피우겠냐고 물었다. 나는 피워본 적도 없고, 별로 피워보고 싶지도 않아서 거절했다. 그런데 맑고 천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왜?"


j9CawYcWdX0VgPVYV94-9rOzPIA.jpg 소피아의 담배 원데이클래스


그녀는 나에게 담배를 가르쳐 주고 싶어 했다.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담배는 이렇게 피우는 거라며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초심자의 눈높이에 맞춘 친절한 가이드(?) 덕분에 한 번 시도해 볼까도 싶었지만, 역시 나에게 담배는 무리였다.


삶은 짧고 담배는 자연이 준 선물이야.


'Tobacco'는 정말 식물이기도 하니까 '담배는 자연이 준 선물'이라는 소피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솔직히 담배는 무조건 해롭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술에 대해서는 무한히 관대한 나였다. 소피아는 자기 부모님도 처음에는 "내 딸이 마약에 중독됐다니!" 하며 슬퍼할 정도로 싫어했지만 막상 해보면 그렇게 나쁜 게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 소피아에게 동의한다. 삶은 짧고 알콜도 자연이 준 선물이니까.


우리는 아로마샵을 나와서 길을 걸었다. 소피아가 이번에는 타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타투를 할 생각이 없냐며, 한다면 무엇을 새기고 싶냐고 물었다. 타투라니,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것을 몸에 새겨야 한다면 무엇을 새겨야 할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 뭘까? 주저 없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가 나에게는 있었던가?


소피아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난 아직 찾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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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소피아


나는 소피아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녀는 이 호스텔에서 일한 지 4일밖에 안 됐지만 이번 달까지 하고 튈(!) 생각이다. 호스텔 분위기가 기대한 만큼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과연 소피아답다. 그녀는 자기가 돈 계산을 잘못했다고 핀잔을 준 상사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직장인 출신인 나는, 그녀의 실수와 상사의 핀잔 중에 무엇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할지 전혀 판단되지 않았다. 1분의 흐트러짐도 없이 매일 출근과 야근을 실천하고, 주말 근무를 밥먹듯이 하며 살아온 나는,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애초에 기본적인 자격이 없었다.


이곳에서 지구 반대편의 기준은 무용한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보기로 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도 태연하게 그럴 수 있는 세상을, 매일 보고 느끼며 여행하고 있었으니까.


해가 지는 거리에서 아이들이 눈동자를 초롬히 빛내며 돈을 달라고 다가오면, 소피아는 "오, 미안해." 하며 아이들의 머리칼을 어루만지곤 했다. 그때의 따뜻한 표정이, 산크리스토발의 서늘한 날씨와 함께 내 감각에 깊이 새겨졌다. 내가 가고 난 뒤 그녀는 호스텔을 그만뒀을까? 부디 길을 잘 찾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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