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요아깐의 크리스티안

"그건 그냥 그들이 하는 일이야."

by 세라

지금 행복하다는 말


꼬요아깐(Coyoacán)은 프리다 칼로의 생가 'Casa Azul(파란 집)'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박물관들이 많았는데, 시간이 남아 그중 한군데인 Museo Nacional de Culturas Populares(직역하면 국립 대중문화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 입장료는 14페소(8~900원)밖에 하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규모가 훨씬 컸고 멕시코의 전통문화 및 대중문화가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관람객이 나 혼자뿐이었다. 박물관을 통째로 빌린 기분으로 자유롭게 관람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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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유일한 사람이라도 만난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크리스티안이라 소개했다. 고향은 멕시코 와하까(Oaxaca)인데, 지금은 왔다 갔다 하며 사진 관련 일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서 공원을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크리스티안은 사진, 나는 영상. 우리는 비슷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서 시작했지만 예술과 상업 사이를 헤매며 초심과 애정을 잃어버린 나. 열정 페이와 워라밸 없는 삶은 열정은 물론이고 젊음까지 앗아간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은 멕시코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수도 적고 일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도 나처럼 모든 것이 지겨워졌을까? 갑자기 멕시코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던 질문을 한번 더 실험해 보고 싶어졌다. 질문은 이것이었다. "너는 만족하니?(¿Estas conte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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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행복해.
¡Si!, Estoy feliz.


놀랍게도 또 통했다. 만족한다는 말, 행복하다는 말. 어떻게 그렇게 환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그의 표정을 훔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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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미안!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이달고(Hidalgo) 쪽으로 넘어왔다. 크리스티안은 내게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전날 밤 인터넷에서 본 야경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기 가 보고 싶어!"


사진 속의 장소는 광장 La plaza de revolución이었다. 크리스티안과 함께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데, 현위치 좌표가 계속 이상하게 움직였다. 아무리 봐도 그가 지도를 잘못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멕시코사람 맞아?


"크리스티안, 이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이 방향이 맞아, 여기서 엄청 가까워. 날 믿어 줘!"


우리는 이 대화를 반복하며 광장에 찾아갔는데, 도착하고 보니 내 호스텔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빛의 속도로 태세를 전환했다. 크리스티안, 미안! 내가 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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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본 야경을 보기 위해서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크리스티안이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혹시 여기서 가까운데 괜찮은 식당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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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르띠야를 나눠먹는다는 것


광장에서 만난 사람이 식당이 모여 있는 거리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직접 동행하며 끝까지 같이 가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는 팁을 요구했다. 역시! 또 당했다, 하고 생각했다. 멕시코에서 그런 식으로 속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팁을 주었다. 물음표 100개를 띄운 내 표정을 본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냥 그들이 하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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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적이나 인터넷에 알려진 화려한 레스토랑과 달리, 현지 친구들과 가는 곳은 적당히 허름한 분위기의 밥집이 많았다. 50페소 내외의 Menú del día(오늘의 메뉴)를 주문하면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음식, 디저트까지, 저렴하게 만족스러운 코스를 즐길 수 있었다. 한국인은 밥심인지라, 나는 꼭 밥을 한 그릇 추가해서 먹곤 했다. 멕시코에서는 밥보다 고기가 메인이지만, 나에게 고기는 어디까지나 반찬이었다. 그래서인지 고기는 너무 많고 밥은 부족한 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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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했다. 그런데 거기에 있으니 자꾸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또르띠야 하나만 주세요.


멕시코 식당 어디든, 어떤 메뉴를 고르든, 우리의 밑반찬처럼 무제한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 있다. 바로 또르띠야(Tortilla). 그 점을 노리고 자꾸 또르띠야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 때문에 자꾸 대화의 흐름이 끊기기도 했거니와 불쾌하기도,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반응은 이번에도 의외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또르띠야를 조금 찢어서 나눠 주었다.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자꾸 왔을 때는 거절하며 돌려보냈지만, 그의 태도는 우리의 그것과는 달랐다.


오, 미안해, 브라더.
Oh, perdón, hermano.


그때까지만 해도 크리스티안이 유별난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나고 생각해 보니 또르띠야 하나를 나눠먹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건가 싶었다. 혹시 내가 이방인의 잣대로 그들의 세상을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이르자 가슴이 철렁했다. 귀천과 선악을 가르는 일을 혐오한다고 말하고 다녔으면서, 어느새 나도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르는 일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식적인 것과 상식적이지 않은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애초에 그런 건 없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기꺼이 또르띠야 한 조각을 떼어주는 세상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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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멕시코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광장이 잘 보이는 조그만 바로 이동했다. 어쩌다 보니 온종일 크리스티안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동행 없이 혼자 다니며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계획에 없던 그와의 동행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크리스티안이 순간순간 보여준 표정과 태도는, 낯선 곳에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는 상식과는 정반대로, 낯선 곳이기에 경계심을 풀고 먼저 다가갈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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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느새 목적지가 배경이 되어 갔다. 아치문 하나밖에 없는 작은 광장이었지만, 그 이상 더할 나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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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 봤던 야경과 거의 흡사한 밝기가 되었을 때쯤, 사진 속으로 들어가듯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어느덧 유치한 말장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저기 물줄기 사이로 뛰어가 볼래?"

"그래. 근데 니가 먼저."

"아니? 니가 먼저!"

"아니야, 니가 먼저!"


분수는 형광색의 물보라를 흩뿌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동네 산책을 나온 듯 편안해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헤어질 때 나는 그의 고향인 와하까(Oaxaca)에 가면 연락하겠노라고 했다.


작은 말과 행동으로 내게 또 다른 멕시코의 모습을 보여 준 크리스티안, 너는 나의 '작은 멕시코'였어. 고마워, 덕분에 즐거운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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