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에 갔던 날이었다. 한 소녀가 나에게 사진을 부탁해 찍어주다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 소녀의 친구라는 브라질 남자와도 인사를 했었다. 그리고 이틀 뒤, 쿠스코의 한 호스텔. 아침을 먹고 있는데 그때 인사했던 브라질 남자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 너도 여기 묵고 있었어?"
"응?"
"마추픽추에 갔지 않았어?"
"가긴 갔는데……."
"그래 그래, 우리 이틀 전에 봤잖아!"
"내가 간 건, 1년 전쯤인데?"
(그리고 서로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 둘은 너무 닮은 것이었다. 키도, 얼굴도, 헤어 스타일도, 무엇보다 목소리도…… 억울했다. 나는 목소리를 듣고 난 뒤에 더 확신에 차서 알은체 한 거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가 아니었다. 급하게 원래의 내향 인간으로 돌아온 나는, 쭈뼛쭈뼛 사과한 뒤 최대한 먼 곳에 앉아 등을 돌리고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잠시 후, 자리를 찾던 그는 장난치듯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인사했다. "¡Hola!(안녕!)"
아직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았던 나는, 이틀 전 너랑 완전히 똑같이 생긴 남자를 만났다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특유의 '그 목소리'로 "No era yo.(내가 아니었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브라질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 아닌가.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주장해 보았다. "¡Era tu!(너였다고!)" 그는 웃기만 했다.
그 아침, 나는 무슨 용기로 낯선 브라질 남자를 붙잡고 너 나 모르냐고 우겨댔던 것인가.
.
.
나단의 숲에서
그는 난데없이 자기를 안다고 주장하는 동양인 여자가 재밌었는지, 나만 괜찮으면 쿠스코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나단(Nathan), 장기여행자로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그 호스텔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탬버린처럼 생긴 악기를 들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연주를 하며 팁을 벌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내키는 대로 떠나곤 하는 식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니 퍽 궁금해졌다.
마추픽추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한 탓에, 어차피 쉬엄쉬엄 보내려고 했던 날이었다. 그를 따라 산책에 나섰다. 언덕을 향해 성큼성큼 올라가는 그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거기에는 동네 뒷동산 치고는 과분한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운동 겸 이 숲에 온다고 했다. 오전부터 숲 공기를 마시고 있자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관광지가 아닌지라 우리가 있는 동안 사람은 딱 한 명 봤는데, 그 사람은 나무 사이에 앉아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마저 신비로워 보였다.
우리는 풀밭에 앉아 쿠스코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교육'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삼성, LG, 기아 등으로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고, 우리나라가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남미에서는 '다 같이 공부하지 않는' 분위기가 문제라고 했다. "쟤도 안 하는 데, 왜 해?" 하는 식이었다. 반대로 나는 '안 하면 나만 뒤처지는' 분위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다들 똑같이 공부하고, 대학에 가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하는 삶에 대해서. 그러나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No'일 거라고 말했다. 나단은 의외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 비록 우리에 비해 스트레스는 덜 받고 살지만, 성인이 되고 나면 결국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나 더 쉽게는 '스틸'하면서 살게 된다고.
간단해 보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대화였다. 정답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대화였다는 것이다. 멋진 풍경과 이국의 축제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소소한 대화만으로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선물이었다.
TMI를 덧붙이자면, 그는 대화하는 동안 자꾸 나보고 피부가 좋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피부가 좋은 편도 아니고 여행 중에 많이 탄 상태였는데, 나단 덕분에 평생 들어보지 못할 칭찬을 실컷 들었다. 반면 나는 나단의 레게 머리가 신기해서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다. 그는 "이거?" 하더니 머리 땋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냥 두 손으로 머리 가닥을 잡고 슥슥 비비기만 했는데 곱슬곱슬한 줄기가 만들어졌다. 너무 신기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
.
나단, 너마저
산에서 내려온 뒤 그가 요리를 제안했다. 우리는 같이 재래시장에 가서 양파, 당근, 계란, 쌀 등의 식재료를 샀다. 완벽하진 않지만 가지고 있는 고추장으로 볶음밥을 선보일 작정이었다. 꽤 괜찮은 임기응변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비상용으로 챙겨 온 비장의 고추장 튜브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나단은 내 요리의 조수가 되어 재료를 손질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가 요리를 시작하자 호스텔 직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심 찬 고추장볶음밥이 완성되었고…… 나는 관중들의 반응을 기대했다. 나단이 가장 먼저 맛을 보았다. 표정은 이상했지만(?)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한 숟갈씩 맛을 보더니…… 난리가 났다!
눈물까지 흘리며 맵다는 것이었다. 맹세컨대 절대 매운 수준이 아니었다. (나도 매운 걸 잘 못 먹는다.) 심지어 '벌칙 음식' 취급까지 당했다. 아니, 너네 쪽 고추도 엄청 맵잖아? 밥이 한참 남았는데 갑자기 나단이 "우린 다 먹었다"며 식사 자리를 마무리지었다. 나단, 너마저?
¿nadie quiere probar mi comida? (아무도 내 음식을 원하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