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물렀던 마을의 풍경
멕시코에서 내가 지냈던 마을, Serdán의 풍경을 단 하나로 설명해야 한다면, 아마도 '화산(Volcán)'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멕시코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고 있고 수많은 화산을 가지고 있다. 세르단은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DF)에서 남쪽으로 2시간 남짓 떨어진 뿌에블라(Puebla)주에 위치하고 있는데, 뿌에블라는 바로 화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딱히 여행자들이 갈만 한 곳은 아니지만, 내가 머물렀던 마을의 모습을 추억해 본다.
3주 동안 이 마을에서 학교를 가면서 매일 아침마다 화산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한강을 보듯, 마치 세뇌적인 풍경. 반복되는 일상 속에 언제나 화산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일 년 내내 눈 덮인 화산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은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한 달 머물다 가는 외지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당연한 풍경으로 각인되곤 했다.
이 지역이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추운 이유는 바로 높은 지대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화산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곳은 멕시코에서 가장 높고, 북아메리카에서 세 번째로 높으며, 현재도 진행 중인 활화산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산 가까이에 가 볼 기회가 생겼다. 나는 멕시코 엄마가 든든하게 싸준 도시락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올라갔다.
양 떼의 습격! 올라가는 길에 소처럼 그려진 표지판들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이 낯선 표지판은 야생 동물에 대한 주의 표시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후에 양 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멈춰 섰고, 양들은 알아서 차를 피해서 옆으로 지나갔다. 새하얀 봉우리를 배경으로 문명에 탑승한 우리를 향해 거침없이 행진해 오는 양떼라니, 정말 멋지다. 우리는 마치 그들의 영역에 멋대로 들어온 손님이 된 듯한 기분으로, 그들이 내어 준 길을 지나갔다.
화산 가까이에만 있다는 꽃들도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길은 점점 험해져서 차바퀴가 몇 번이나 흙에 빠졌다. 더 이상 차로 올라갈 수 없는 구간부터는 내려서 걸어갔다. 하지만 차로도 가기 힘든 길은, 우리 역시 맨몸으로는 쉽지 않은 곳이었다.
어느 정도 이상 올라가자 온도는 급격히 떨어지고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때려댔다. 우리는 반쯤은 소풍 온 기분으로, 반쯤은 모험하는 기분으로,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며 춥고 험한 길을 올라갔다. 매일 눈에 익어 있던 심심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했다.
하얀 봉우리가 아득했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했던 배경 속을 거닐며, 아마도 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의 '고향'이란 이란 모습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얼굴에 부딪는 거친 바람, 무심한 듯 뾰족한 선인장, 이 모든 건조한 풍경을 하얗게 비추는 가깝고도 먼 봉우리…….
며칠 뒤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이곳 축제 의상이다. 내 생각이 맞았다, 이곳 마을, 우리 동네, 하면 생각나는 것은 배경에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 봉우리 하얀 화산이었던 셈이다.
옷에 그려진 성당은 촐룰라에서 본 성당인 것 같았다. 한번 봤지만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도 무의식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이야말로 마음속의 고향일 듯 싶다.
Volcán Citlaltépetl(볼깐 씨뜰랄떼뻬뜰)이라는 이름에는 별의 산(Monte de la estrella)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별처럼 빛나는 설산에 대한 동경,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대한 상상과 호기심이 수많은 전설 속에 녹아 있다.
실은 나조차도 이 마을에 적응한 뒤, 이 산이 그렇게 거대한 존재인지 자각하지 못했었다. 동네 뒷동산 마냥 여기곤 하던 이곳이 멕시코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었다는 걸 안 것은 한참 뒤다.
빨갛고 뜨겁기만 한 화산의 이름이, 별과 구름, 하얀 눈으로 지어진 것은 묘한 일이다. 나와 그들의 추억, 우리들의 노스탤지어가 언제나 마음속에 배경인 듯 하얗게 그렇게 머물러 있기를. 별산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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