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후 나의 첫 번째 보금자리는 고시원이었다. 나는 거기서 대학 생활을 다 보냈는데, 그때만 해도 내가 거기서 4년 반이나 살 거라는 것도 몰랐고, 그때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정착한 시기가 될 거라는 뜨악한 사실도 몰랐다. 스무 살의 내가 향후 10년간의 미래를 스포일러 당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살던 건물은 가로로 긴 4층짜리로 1,2층은 상가, 3,4층은 고시원이었는데 두 층 증에서도 좀 더 작은 방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3층, 거기에 내 방이 있었다. 긴 복도를 따라 주욱 걸어 들어가면 맨 끝에 있는 방. 그 긴 복도를 따라 다시 주욱 걸어 나와 현관을 나오면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공용화장실이 있었다. 따로 마련된 공용 주방도 있었다. 주방에는 유리창으로 된 냉장고가 하나 있었는데 한 층에 두 호실이 사용했다. 당시에는 '견출지'라는 고리타분한 스티커로 모든 걸 구분했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들은 뒤섞이기 일쑤였고 그 영향인지 우유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식들의 자잘한 도난(?) 사건이 빈번했다.
우유 도둑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불 도둑도 있었다. 고시원 방 안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복도에 빨래를 널어놓곤 했다. (다행히 여성 전용 고시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빨아놓은 이불이 사라졌다. 황망했다. 우유 하나 따위와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일요일마다 알바로 일급 3만 원을 벌어 '일주일 살이'하던 짠내 나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를 가엾이 여긴 동아리 선배가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께 사정을 얘기해 남는 이불을 하나 갖다 주었다. (아, 네 글자로 동네망신이다.) 그런데 선배가 준 그 하얀색 이불의 감촉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하얀 이불을 달처럼 품에 안고 골목길을 걸었을 선배의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입가에 하얀 만두 같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끝내 이불 도둑은 찾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너무 배고파서 남의 음식을 훔치듯, 너무 추워서 남의 이불을 훔쳤던 걸까. 이불을 훔쳐야 할 정도로 추운 사람이었던 걸까. 퀴퀴한 고시원 복도에나 널려 있는 변변찮은 이불에도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면, 이런 이들을 '도둑'이라 부르는 게 가당키나 할지.
#1-2. 귀신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귀신을 무서워하는 버릇이 있었다. 미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운세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복도'였다. 그것도 '긴'. 밤이면 고시원의 복도는 암실처럼 캄캄해졌는데, 하필 내 방은 복도의 끝에 있었던 거다. 친구들과 실컷 떠들다 온 날에도 캄캄한 복도 앞에만 서면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방으로 향하는 미션을 수행할 때마다 누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 고개를 홱 돌리면 뭔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돌아보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뒷목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 고작 복도를 지나 고시원 방에 들어가는 게 세계의 끝으로 가는 통로 마냥 길고 길게만 느껴지던 나날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그토록 잘 수축하는 심장의 소유자가 하필이면 어두운 복도 끝방에 4년 반이나 살아야 했다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비장해져야 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1-3. 알바
그 고시원에서 살면서 했던 알바. 수학 과외, 영어 과외, 꽃집, 토스트집, 치킨집 서빙, 화학 실험실, 도서관 책 정리, PC방, 돌잡이 플룻 연주, 떡 포장, 북카페, 백화점 추석 옷 행사, 컨벤션 센터 홍삼 홍보, 사무 보조…… 이런데도 왜 그렇게 가난했냐, 젠장.
#1-4. 낭만
그 시절에는 나같은 '궁상쟁이'들이 더러 있어 내게도 짜한 로맨스가 몇 번 있었더랬다. 그중에서도 고시원에 얽힌 사연.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동갑내기 이성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 말이 있다며 우리 집 옥상에서 잠시 보자는 것이었다. 아니, 많고 많은 장소 중에 하필 왜 내 고시원 옥상? 딴 데서 보자며 몇 번 구시렁거리던 나는 결국 약속 시간에 맞춰 귀가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층인 4층에 내렸다. 그때까지 나는 방에서 부엌, 복도에서 화장실 등 뻔한 동선만 오가며 살았기 때문에 한 번도 고층(?)으로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뜬금없이 옥상에 올라가 보게 된 것이다. 올라가는 계단 양옆에는 촛불들이 켜켜이 놓여 있었다. 그때 내가 한 생각은 오직 이거다. '오, 예쁘다.' 눈치코치 통째로 밥 말아먹은, 참으로 아련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계단 끝에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이 재현되고 있었다. 내 친구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 있었고, 스케치북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뭔가 달콤한 말들이 적혀 있었고, 이벤트의 끝에는 꽃과 반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내게 과분한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 뭔지 알기나 했을까. 단지 이렇게 세월이 지나 내 기억 속에 그 고시원이 마냥 으슥하고 큼큼하지만은 않은, 올라갈수록 켜켜이 빛이 나는 화사한기억도 하나쯤 남겨져 있다. 그래, 사랑이라는 지끈하도록 복잡한 건 그때는 몰랐을지 모른다. 그래도 말이다, 고시원은 감히 스무 살의 젊음을 가두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