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거처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이모집이었다. 인턴 합격 후 출근 일정이 빠듯해 우선 임시로 이모집에 묵기로 한 것. 고시원 방에서 나와 남쪽 끝의 고향 집에서 두어 달 머무른 뒤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해야만 했던, 생각해보니 그 뒤로도 두 달 뒤 이사를, 네 달 뒤 또 이사를 해야 했던, 나는 차라리 여행자에 가까웠다.
사촌 동생들은 나 때문에 방 하나를 비우고 둘이 같이 방을 써야 했다. 그때는 깊이 체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리 친척이라도 집에 객식구를 들이는 게 얼마나 어렵고 불편한 일인가를. 이모네 가족들은 모두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고, 나도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며 지냈다지만 그건 또 얼마나 허술하고 서툴렀을지.
이런 날도 있었다: 회식을 하고 온다. 술을 마셨지만 티도 나지 않을 정도임. 민폐 끼치지 않도록 최대한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조용히 씻고 살금살금 방에 들어가 잔다, 고 생각하지만, 다음날 아침 초중딩 사촌 동생들이 밥을 먹다가 이모에게 버젓이 말하고 있다. "엄마, 누나 어제 완전 술 취했던데?"
삐용 삐용, 나는 어린 동생들에게 비교육적일 뿐만 아니라 불건전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얹혀산다는 건 왠지 예쁜 박스에 잘못 분류된 불량감자가 된 느낌 같은 것.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감자는 감자지, 고구마가 될 수 없음. 그리고 어쩌면 나의 독립을 부추긴 건 음주의 자유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었으리라.
#2-2. 아멘
이모네는 전형적인 크리스천 집안이었다. 참고로 할머니는 불교, 엄마는 무교, 이모는 교회, 나는? 나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믿지 않다가, 최근에는 오히려 다 믿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 풍파에 데이고 베이며 세상 모든 신들을 원망하다 못해 극단적으로 겸손해진 케이스다.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동네 산신이든 도와만 달란 말이다!)
아무튼 당시 저녁마다 돌아오는 기도 시간에 참여하는 건 이모집의 어떤 룰 같은 것이었다. 매일 동그랗게 마주 앉아 돌아가면서 성경을 한 줄씩 읽고, 손을 잡고 기도를 올렸다. 이모부가 해 주셨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천지 창조와 인류의 기원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시면서 이런 이야기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테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다 순하게 들려서 걸림 없이 믿어지기도 한다는 거다. 오, 그렇다면 나는 정말 탁하고 탁하구나.
이렇게 탁해 빠진 마음으로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나는 매일 저녁 기도를 함께 했다. 지나고 보면 그래도 그 순간들이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무엇을 빌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매일 밤 무언가에 간절해져 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 어느 한 완고한 세계로부터 배척받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멘.
#2-3. 이모의 눈물
나는 독립하기 위해 고시원을 알아보고 다녔다. 보증금이 없으니 고시원에 들어가는 것 외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멍만 한 방 크기에 비해 월세들은 아주 무시무시했다. 당시 직장 근처인 남부터미널역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다녔는데, 위치가 괜찮고 그나마 깔끔한 곳은 한 달에 70만 원도 달라고 했다. 인턴 월급이 100만 원도 안됐기 때문에 패스…… 패스, 또 패스……. 결국 물티슈 두 세 장만으로도 금방 다 닦을 수 있는 40만 원짜리 방을 찾았는데, 그 방은 바로 옆에 공용 세탁기가 있어서 다른 방보다 조금 더 싸다고 했다.
이사를 하기로 한 날, 박스 2개에 짐을 다 담아 이모 차에 싣고 고시원에 갔다. 이모와 함께 내 호실 방문을 연 순간이었다. 방을 본 이모는 갑자기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시는지, 마침내 고시원 방문을 꼭 닫고 나를 침대에 앉혔다. 이윽고 만감이 교차한 듯 오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냥 이모집에 가자"
좀 칙칙하고 비좁은 방이어도 나는 정말로 괜찮았는데, 서울살이 해 보겠다고 올라 온 스물넷 조카를 보는 이모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결국 다시 짐을 그대로 싣고 이모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한강에 잠시 차를 세우고 잠수교의 화려한 물줄기를 바라봤다. 거기서 이모집에서 조금 더 신경 써 줬으면 하는 몇 가지 사항을 듣고, 그러겠다고 했다.
참으로 머쓱하게 다시 사촌 동생의 방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안방으로 들어간 이모가 이모부와 이야기를 하다 꺽꺽 우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