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과 계란은 무제한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2011~2012)

by 세라

#3-1. 라면과 계란


이모집에서 나와 결국 들어간 곳은 역삼동의 한 고시원이었다. 나는 선릉역 근처의 한 회사에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130만 원 정도의 월급은 그 유명한 '열정 페이'였지만, 이 (망할 놈의) 업계에서 입문하기로는 괜찮은 수준이라고 상사는 늘 말했다. 나는 그 월급으로 방세도 내고 폰값도 내고 학자금 이자도 내고 커피도 사 먹고 사회생활도 했지만, 목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악착같이 모으는 대단한 친구들도 있다지만 내게는 그 정도의 능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 고시원을 선택한 건 세 가지 장점 때문이었다.

1. 직장에서 도보 가능한 거리

2. 50만 원 이하의 월세

3. 라면, 계란 무제한 제공


실질적인 생활에서는 의외로 3번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혼자 살다 보면 라면은 주식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 아주 질려서는 영영 찾지 않을 것 같이 굴다가도 역시 아무려나 내 곁엔 라면밖에 없는, 한마디로 애증의 자취 음식이다. 그런데다 계란까지 무제한으로 준다니, '혜자롭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고시원 동지들은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 라면과 계란을 많이 축냈으니까.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면 언제나 동지들이 끓이는 뭉근한 라면 냄새가 날 반겨주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그 겨울, 나 쓸쓸하지만은 않았노라……


고 쓰며 흐르는 콧물을 슬쩍 훔쳐본다. 나는 아직도 라면을 좋아한다. 라면에 계란 넣어 먹는 거, 아주 좋아한다.


혹여 고시원 주인이 이 글을 보신다면 너무 구박 마시라. 라면조차 없었다면 우리 가난한 고시원생들은 무엇으로 그 추위를 견뎠겠는가.



#3-2. 창문


강남 한복판의 위치 치고 월세가 나름 저렴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두 가지가 가장 컸던 것 같다.

1. 창문 없음

2. 남녀 공용


이 두 가지는 즉, 환기가 잘 되지 않으며 문을 함부로 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느 날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겨우 두 뼘 정도의 간격으로 붙어 있던 내 옆방 남자가 방문을 열고 배를 드러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통로 끝쪽이라 가는 길 내내 그 허여멀건한 배를 봐야만 했다. 아악, 내 눈, 내 눈!


나는 그가 불쾌하고 상식 없는, 자신을 마구 방치한 아저씨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군인들도 경찰들도 안쓰러운 동생 같이 느껴지는 나이에 오고 보니 말이다, 그는 그저 공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답답했던 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구멍만 한 창문이라도, 아니 구멍 같은 거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통로에다 배를 벌러덩 까 보이고 있었을까. 창문 없는 방은 내게도 고통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누워서 커다란 돗자리 같은 천장을 올려다볼 때마다 이상한 최면에 걸린 듯 세상이 부유하곤 했다. 창문 없는 좁은 방은 그렇게 젊은이들의 자존심도, 수치심도, 활력도, 천천히 좀먹어갔다.


우리에게 창문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새 공기를 마시며 좀 더 청량하고 건강한 시절을 보냈을까. 그게 비록 매연과 먼지가 가득한 서울 공기일지라도.



#3-3. 노 프라이버시


답답한 방 안에는 심지어 화장실이 내장되어 있었는데, 화장실 벽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뭔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니까 그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은 화장실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곳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공부도 했다. 화장실 문을 열면 한 걸음만에 앉을 수 있는 책상이 있었고, 화장실 바로 옆쪽에 침대로서의 최소 조건을 갖춘 겨우 침대 같은 게 있었다. 아무리 짐을 줄여도 정리할 공간이 없어 너저분했으며, 그 방 안에서는 '걷는다'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했다. 우주선 내부도 이만큼 생존필수적일 순 없으리라.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딱 한번 친한 친구를 데려온 적 있다. 잠시 있다 나갔지만 친구는 나중에서야 사실은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걸 참았다고 털어놓았다. 비주얼, 사운드, 뭐 하나 불경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리는 그런 더러운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렸다. 그러고 보니 소위 강남 부자들의 집에는 그 고시원 방보다 넓은 화장실이 있겠지 싶다. 나도 강남인데. 강남 중에서도 아주 한복판인데. 참나, 이렇게 더럽고 치사할 수가 없다.


사람 사는 곳을 화장실만 하게 지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그게 제아무리 우주선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건 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래.



봄이 조금 더 빨리 오길 기도했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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