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이 될 때까지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이게 10번째인지 더인지도 가물가물하다. 투잡, 쓰리잡의 알바까지 포함하면 너무 헷갈리기 때문이다. 퇴사 경험치, 나보다 많은 사람 나와 봐. 여기까지 와서 더 이상 쪽팔릴 것도 없다.
방치해 뒀던 브런치에 접속했다. 고민 많은 평소의 나와 달리 번개처럼 제목과 주소를 정하고 글쓰기를 눌렀다. 급하게 달려와 거칠게 냉장고를 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기분으로. 어디에라도 분출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뭐가 될진 모르겠는데 일기를 좀 써 보려고.
월요일 오전이었다. 전세 대출 금리가 거의 2배로 뛰었다는 문자를 받았다.순식간에 한 달에 내야 할 대출 이자가 약 100만 원으로 불어났다. 게다가 전기세, 가스비, 교통비까지 폭등 중.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상가도 아닌데 비싼 영업용 요금이 적용되는 오피스텔이다) 숨만 쉬고 있어도 한 달에 최소 120만 원을 상납해야 한다는 얘긴데, 누가 들으면 대도시에서 호화로운 솔로 라이프를 누리고 있는 줄 알겠다.
같은 날 오후, 구조 조정을 위한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다. 10년 넘게 다닐 수 있는 좋은 회사라느니, 별일 없으면 2년 뒤 연장된다느니 하는 말에 꾀여 2년 전 합격한 몇몇 회사들 중 신중히 선택한 곳이었다. 하루아침에 금리 폭탄을 맞고 회사에서 잘렸다. 살라는 건가, 죽으라는 건가. 퇴근길 한강 다리를 건너며 아득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미안하다는 말, 자기가 죽일 놈이라는 표정. 나 이 표정 처음 보는 거 아닌데. 저 표정을 품었던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참으로 익숙하다. 그 순간 납작 엎드려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거, 돌아서면 상관없는 남의 인생, 허무할 정도로 쉽지 않은가? 그래, 나라도 그러겠지. 그러나 나에겐 그런 포지션이 허락된 적 없다. 그리고 순간 알았다. 나는 결코 좋은 어른이 못 될 거라는 거.
며칠 전 전체 회의에서 상사가 이런 말을 했다. 영상 미디어 인력은 크리에이티브를 위해 1년이나 2년 지나면 교체하는 게 맞다고. 업계가 모두 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러니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어 놓으라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 소모될 것을 알고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젊고 열정 가득할 때는 그럴 수 있고, 나도 그랬다. 그렇게 내게 남은 건 YOLO와 MZ세대라는 오명과 끝없는 끝의 반복뿐. 20대 때는 일명 욜로라고 불렸고 30대가 되니 그 말은 MZ세대로 바뀌었다. 이런 말들은 그저 '다름'을 이해하기 싫어서 지어낸 명분 아닌가? 그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든 나는 내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면접 때마다 이직 경력을 지적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부끄러울 게 없었다. 다만 이를 해명하고 어필해야 하는 상황들에 신물이 났다. YOLO, MZ, 그다음은 뭘까?
착해지면 착해질수록 외롭고 억울한 세상이다.더 이상 나에게 착한 마음을 기대하지 마시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들을 기꺼이 비난해도 된다는, 가증스러운 위악을 요구하지도 마시라. 일을 할 땐 본성을 거칠게 드러낼 줄 알아야 빠르게 인정받을 수 있다. 양처럼 온순한 표정을 짓다가도 사자처럼 재빠르게 물어뜯을 줄 알아야 한다. 믿음은 곧 방심이다. 살아남으려면 괴물 같은 마음으로도 인간을 위해야 하고, 야성을 감추고동료를 밟아야 한다. 지겹다. 이 능숙한 절망. 모욕과 환멸과 증오와 불신.
친구 한 명에게 퇴사가 확정됐다고 말했더니 직장인의 굴레에서 벗어난 걸 축하한다고 했다. 실업급여가 부럽다고 했다. 그런 장난도 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목을 벅벅 긁었다. 피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