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커피나 마시고 시나 읽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중요한 건 돈이고, 밥이고, 집이다. 그래서, 그래서 퇴사하고 나면 전세 대출 이자 어떡할 건데? 120만 원 넘는 집세 어떻게 감당할 건데? 물론 내가 뭔가를 결심한다고 해서 COFIX 기준금리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저런 전세 대출 상품과 조건과 뉴스를 검색하다가 답답해서 은행에 직접 가 봐야겠다 싶었다. 같은 은행이라도 지점이나 상담원에 따라 천차만별인 데다 물건지와 가까운 동네 은행에 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급하게 오후 반차를 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나한테 내일이 어디 있어? 당장 알아보러 가야지! 어차피 이제 갑자기 휴가 쓴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이에 대해서도 차차 써야겠다.)
혹시 모르니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서류를 준비해서 시중은행 4군데를 돌았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버팀목 전세 대출로 대환(갈아타기)이 가능한가?(내가 계약했던 시점보다 조건이 완화됐다고 해서) 만약 이사를 간다면 신규로라도 가능한가?
2. (1이 안 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은행 대출 상품이 있는가?
3. 전세 대출 '고정 금리' 상품이 있는가? 있다면 금리는 몇 프로인가? 현재 상태에서 대출만 바꿀 수 있는가?
4. 금리를 인하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우대조건 추가 등)
5. 이사를 간다면 중도상환수수료는 얼마인가? 이사를 가는 게 유리한가?
오후 내내 이 은행 저 은행 발을 동동 구르고 다녔다. 덕분에 궁금했던 건 다 해결했지만, 결론적으로 현실은 원점이었다.
1. X. 조건이 맞지 않아 버팀목 전세 대출은 불가능. 조건이 맞았다고 해도 이사한 지 3개월 이상 지나면 현재 집에서는 불가능.
2. X. 더 나은 상품 없음. 모두 똑같이 금리 폭발 중.
3. O. 몇몇 은행에 전세대출 고정금리 상품이 있었는데, 현재 들어가면 5점대 초중반의 금리로 예상됨. 국민은행에서는 타행 대출 중에 갈아타기도 가능하다고 함. 대신 이사를 가거나 현재 집에서 임차보증금을 증액해서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함.(기업은행에서는 2022년 말에 4프로 후반대의 전세대출 고정금리 상품이 엄청 인기가 많아서 타행에서도 많이 와서 갈아탔다는데, 지금은 다 올랐다고…)
4. X. 금리인하요구권을 신청하는 방법. 하지만 신청 조건이 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만약 충족해도 0.1% 정도 내릴 수 있다고 함.(나도 신청 조건 안 됨.)
5. X. 현재 내 상태에서는 70~80만 원 정도. 이사비와 복비까지 고려하면 타행 고정금리로 갈아타느니 차라리 6개월 뒤의 변동금리를 지켜보는 게 나음. 그렇다면 3번도 다시 X.
……괜히 가서 실망만 하고 왔네.
사실 이미 많은 서칭을 해 보았기에 가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래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사까지 각오하고 간 건데, 역시 허탕만 치고 온 것이다. 결국 지금은 금리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일단 6개월간은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은행 상담원 대부분은 이미, 폭발한 금리 때문에 찾아온 나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모양이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설명해 줘도 어르신 분들은 납득을 못 하고 계속 우긴다면서 나에게 빠르게 이해한다며 고마워했고, 어떤 분은 금리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며 다 같이 죽자는 거냐고 (나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셔서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특히 한 분은 상황이 끝나고 추가질문을 계속했는데도 너무 친절하게 응대해 주셨고, 해당 은행에서는 안 되는데도 소득 서류를 보여드리자 "괜찮아요, 봐 드릴게요. 힘드실 텐데……" 하면서 공감해 주셔서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남은 유일한 방법은 내가 빠르게 이직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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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은 성과급 파티
며칠 전에 직무가 딱 맞는 회사가 한 군데 떴었다. 은행을 돌고 집에 와서 지원서를 써 보는데, 이름, 학력, 자격, 경력, 경험, 포트폴리오, 자기소개…… 아, 지금 이게 또 뭐 하는 거지…… 나는 입사지원의 윤회에 갇힌 것인가…… 도저히 진도를 나갈 수 없어서 브런치를 켰다. (내일까진데) 자소서 100개 정도야 소싯적에 다 써 봤고, 중고 신입은 물론이고 중고 경력까지 두루 경험해 봤다. 문제는 나는 지금 좀 쉬고 싶다는 것이고, 쉬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잘 참아 왔던 술(하필 고량주)과 라면을 꺼냈다. 젠장,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커피나 내리고 시나 읽지 그랬어. 시간이 흐르지 않는 내 안락한 공간에서 홀히 커피를 마시고 피아노를 치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고고하게 버티다가 그 모양 그대로 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지금 당장 고량주를 퍼 마시고 화석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