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부에서 연락이 왔다

퇴사 D-29

by 세라
가슴이 웅장해지는 사직서의 세계

그 유명한 '인사부에서 연락이 왔다', 이렇게 나도 퇴사 대열에 합류해 한번 제목으로 써먹어 본다. (사진은 지금 말고 예전 회사 사직서. 실제로 제출했던 종이다... 하하하)




그렇다, 인사부에서 연락이 왔다. 정확히는 '귀하는 2023.OO.OO일부로 당사와의 근로 계약이 종료됩니다.'로 시작되는 '계약 종료 안내 통지서'. 메일에는 처리 절차에 대한 안내와 앞날에 건승을 빈다는 내용이 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수많은 회사를 다녀봤지만 이번 회사의 퇴직 절차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했다. 사직서 기안은 물론 전산장비 반납과 명의 변경, 인수인계서 제출, 사원증 및 법인카드 처리, 퇴직 면담, 보안 점검 등 그 외에도 15개 넘는 서류 및 사항을 확인해서 각각 해당 부서에 가서 직접 사인을 받아서 제출하라고 한다. 이것 말고도 더 많이 있는데, 회사명 노출을 피하기 위해 줄인다.


복잡한 문서를 준비하고 있노라니 슬픔보다는 분노가 더 커지는 오늘. 내 작업 파일 백업하고 채용 공고 찾고 입사 지원 하기도 바쁜데 사람 잘라놓고 웬 문서 노동이람. 일단 가장 간단한 것만 빨리 처리해 놓고,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입사지원서를 열어 꾸역꾸역 억지로 써서 제출했다. 입사지원서를 내기도 전에 이미 면접 보러 가기 싫어 죽겠는데,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이 고민 또한 지겹도록 많이 했지만, 대학교 때 프린트비가 없어서 리포트를 제출하지 못한 그때와 같이 막막하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나는 여전히 어릴 적의 사무치는 가난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내 전공을 살려 한 가지 일을 10년 넘게 했는데도 내 집 마련은 커녕 16년 만에 겨우 단칸방 탈출에 성공해 서울 외곽의 투룸에 입성했으나, 전세사기에 당하고 회사에서 구조 조정 당하고 전세 대출 금리는 2배로 오르고 거리에 나 앉게 생겼다. 사람을 쓰고 버린 수많은 회사, 갑질, 배신, 열정 페이, 남녀혼숙 고시원, 하숙집, 창고방, 비싼 월세, 층간 소음, 부동산 사기…… 사는 게 아사리판이자 시시포스의 형벌인데 연애는 무슨, 결혼은 무슨. 그뿐인가, 세월호, 이태원 참사, 이상 기후, 코로나, 전쟁, 물가 폭등 등 우울한 일 투성이다. 나는 왜 아직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는가? 우리 세대는 부모보다 더 가난한 세대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내 부모님은 가난했고, 졸업한 지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학자금 대출은 아직도 상환 중이다. 요즘은 청년 전용, 청년 혜택 이런 것도 많지만 X세대에 가까운 밀레니얼 세대로서 내가 한창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는 그런 제도도 희박했고, 지금 와서는 조건이 잘 맞지 않는다. 20대 내내 알바의 여왕이었고 투잡도 뛰어봤고 쓰리잡도 뛰어봤고 한때 자격증과 어학, 봉사활동, 교육과정 수료증을 모으다시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 끝에는 실업뿐이고 까마득한 절벽뿐이고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면……. 처절한 몸부림 끝에 드디어 세상의 끝에 도달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 길은 더 큰 절망과 고독으로 향하는 길인데 거기 말고는 길이 없고 뒤에서는 산짐승들이 쫓아오고 있다면…….


오늘은 폭탄 금리가 적용된 전세 대출 이자가 빠져나가는 날이기도 했다. 통장에 폭격을 맞고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아아, 나는 왜 아직도 미쳐버리지 않았는가. 하등 멀쩡한 정신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이 회사 다음에는 또 다른 회사가 있다는 악마의 협박에 굴복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입사지원서에 서명을 했다.


삶을 '병원'이라고 표현했던 보들레르의 시가 생각난다. 이 세상 자체가 한 채의 병원이라서, 난로 앞으로 가 봐도, 창가 앞으로 가 봐도, 침대의 위치를 바꾸려 해 봐도, 결국 여기는 병실이고 나는 환자라는 것. 시인은 절규했다.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이것은 나의 절규이자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절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애써 하고 있는 일들이 사실은 이 거대한 병원을 끝없이 증축시키고 있는 일에 불과하다면……?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이 문장도 생각난다. 멀지 않은 내 미래의 모습 아닐는지.

예전에는 일이 더 간단했고 필요할 때마다 광고를 내면 그만이었다. "젊은이가 일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광고를 내야 할 판이다. "아쉽게도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고 젊기는커녕 늙수레하고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린 남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잠자리를 제공해주실 분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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