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모니터 안에서 술을 마시는 여자

퇴사 D-24

by 세라

엄청난 무기력에 사지가 무겁게 가라앉은 하루였다. 주요 업무에서 손을 뗀 지 꽤 많은 시일이 지났고 이제 사무실에서 내 자리는 동동 떠 있는 외딴 우주 같다. 어둔 새벽에 출근하고 어둔 밤에 퇴근했던 수많은 날들…… 이제 목에 매달아 놓았던 쇳덩어리를 풀어준다는데 나는 왜 아직도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나. 지하 사무실의 공기는 퀴퀴했고, 내 자아는 저 멀리 어디선가 웅크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외장하드에 소스를 정리하고 백업해두려 했으나 폴더를 제대로 열어보지도 않았고, 점심시간에는 좀비처럼 목을 대롱거리며 잤다. 그런데도 각성이 되지 않아 헤롱거리는 가운데, 오후에는 촬영 현장에 나갔지만 거의 내내 흡사 유체 이탈의 상태였다. 세상이 나를 두고 10배 정도의 속도로 먼저 흘러가는 것 같다. 나는 어디에 멈추어 있으며, 이 시각 내 안에 무엇을 각인하고 있는 것일까.


모니터에 오랫동안 같은 화면을 띄워놓으면 전원을 끊어도 잔상이 남게 된다. 그걸 '번인 현상(Screen burn-in)'이라고 부른다. 고정된 위치에 같은 장면이 너무 오래 노출되면 빛과 열에 의해 화면이 망가지는 것이다. 사무실에 그렇게 버려진 모니터가 하나 있다. 수명이 소모되는 모든 것들은 그런 식으로 망가지는 게 아닐까. 나도 이제 그 모니터 옆으로 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나는 무엇에 반복 노출 되었는가. 내 원래의 빛깔은 무엇으로 인해 흐려졌는가. 이제 내가 영구적으로 안고 가야 할 자국은 어떤 모양인가.


나는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 안의 새로운 것들은 수많은 회사를 거치며 지나치게 앞당겨 소모되었으며 애석하게도 나는 새로운 것이 끝없이 샘솟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 가장 고리타분하다. 이 스마트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이란 터치 한 번에 헌 것으로 추락하기 마련이고 한 분야의 장인들 또한 그런 식으로 해고되며, 아마도 망가진 모니터 안에는 추락한 것들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 주야장천 술을 마시며 잊혀진 것들의 제사를 지내주리라.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베개 삼아 무지근한 잠에 들 것이다. 아무도 망가진 모니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문득 시선이 닿은 곳에 깍지를 꽉 끼고 있는 한 손 같은 두 손이 있었다. 그곳은 지하철이었고 그 손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던 것은 오지 않았고 그 사람은 저도 모르게 들어간 힘을 툭 풀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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