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여관에서의 체크 아웃

퇴사 D-10

by 세라

채워져 있던 자리가 조금씩 비워져 간다. 사무실 벽에 덕지덕지 붙여놨던 포스트잇과 자석들을 떼어내고 버렸다. 책상 밑에 뒀던 비상용 운동화도 챙겼다. 오랜만에 보는 낯선, 빈 공간들이 그동안 내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불러온다. 내 시선 밖에서 산은 산, 물은 물로서 언제나 존재해 왔던 것들. 나는 무엇에 그렇게 울며불며 매달렸던가. 생각 하나가 뒤집힐 때마다 세상은 반전된다. 자꾸 뒤집히는 세상은 시 같다. 시를 쓴다는 건 일상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일. 그렇다면 나는 지금 시의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다.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린다. 시간은 시간, 모래는 모래. 그 이상 무엇을 바랐던가. 나 그동안 허수경 시인이 명명한 '착각 여관'에 잠시 머물렀던 게 아닐까.


착각은 시인이 이 지상에 개점한 여관에 든 최초의 손님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의 영혼에게 가장 많은 잔심부름을 시키는 이 손님을 시인은 내몰 수가 없다. 잔심부름의 대가로 시인이 얻는/잃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 시인은 이 공존을 받아들였다.

-허수경 산문, 「오늘의 착각」


착각으로 살아낸 한 추운 시절, 나는 직업이라는, 회사라는 겉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었다. 오늘은 경칩이라 하였다. 낮 기온이 제법 올랐다. 착각의 겉옷을 벗을 때가 되었다. 나는 겹겹이 입고 있던 옷들을 차례차례 벗어서 원래의 자리에 걸어두었다. 이 어리석은 착각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으므로,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언젠가 이 시절을 순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시 없이도 시심(詩心)이 너울너울 가슴에 스미는 기이한 날이었다.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하기만 해도 될 것 같았다. 읽지 않은 시집들을 품에 안고 오후의 스러지는 햇빛 속으로 찰박찰박 걸어 나왔다. 잔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시야를 약간 가렸지만 이렇게 헝클어진 일상을 사는 것이 내겐 익숙하다. 나도 모르게 해를 정면으로 바라봤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서서히 초점을 되찾았다. 때 맞춰 도착하는 당신들의 위로. 여과 없이 스며드는 입자 고운 말들. 오늘 내 마음에는 분노가 일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기.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에 몸을 싣고 오늘도 한강인 한강을 바라본다. 저, 이제 막 착각 여관에서 체크아웃했습니다. 제 것 아닌 것들은 두고, 제 것들은 잘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기사님, 한 시절의 탑승객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바람이 다시 한번 이마에 찰랑 와닿았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꽉 찬 포도알처럼 그득히 영글었다. 나는 열매를 하나 따서 맛본다. 나와 당신이 아는 모든 맛이 거기에. 지하철 플랫폼으로 내려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어디론가 걸어간다. 오늘 하루 그대들도 힘들었지요? 문득 한 명 한 명에게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들불처럼 번지던 마음이 다 어디로 갔을까. 쓰지 않음으로써 써지는 불립문자의 시간을 받아쓴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내 마음은 잔잔했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채워져 있던 자리가 조금씩 비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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