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축주에게 직접 연락해 계약 해제를 요청하기 전, 순서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 컨설팅 업체 직원이자 건축주의 대리인인 스티븐 씨에게 먼저 연락했다. 프랭크에게 전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중은행이 대출을 거절했음을 설명하고, 특약사항에 따른 반환을 요구하며 계좌 번호를 보냈다. 그러나 스티븐 씨는 나에게 되레 '일방적이고 무례하다'다며, 나의 계약금 반환 요구가 '갑질'이라고 소리쳤다. 또한 은행이 대출을 거절한 게 말도 안 된다며 '은행에 민원을 넣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는 공방전 내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의가 없다'며 논점을 흐리고, '이랬다 저랬다 한다'며 단순 변심으로 몰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프랭크와 스티븐을 거쳐 건축주에게 직접 연락했다. 건축주는 응답이 없었지만 반복해서 의사를 전달하고 대출 거절 증거를 전송했다.
어이없게도 그 이후, 컨설팅 업체와의 갈등을 해결해 주겠다며 다시 프랭크에게서 연락이 왔다. 프랭크는 이번에는 '자기 돈으로 먼저 계약금을 입금해 주겠다'는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다. 자칫 잘못 이해하면 계약금을 돌려준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전세사기에 더해 이중 채무 관계까지 만들려는 아주 악질적인 속셈이었다.
이상한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출 은행에 대한 정보는 비밀이라도 되는 양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계약금을 받아야만 대출 은행을 알려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쳤다. 금전소비대차는 돈을 빌려주고 갚겠다는 약속에 대한 서류로 계약금 반환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으며, 쓰는 순간 내가 프랭크에게 돈을 빌리는 구조로 역이용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변호사님의 조언에 따라 "특약에 따라 계약금을 반환하고 계약금 반환 확인서를 작성하자"고 말했지만, 프랭크는 끈질기게 나를 대출 미협조로 몰아갔다. 게다가 '갑질' 모략에 이어 이번엔 '손해배상 소송'까지 하겠다고 한다.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분들은 이런 반응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나를 호구로 보고 협박하는 거라고, 여자고 사회초년생이고 잘 모르니 겁 주는 거라고 했다. 강하게, 더 강하게 나가라고 뒤에서 밀어주셨고, 사기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며 같이 목소리를 높여주셨다.
중개사 브라더 씨도 갑질은 그쪽에서 하고 있는 거라며, 은행 민원도 자기가 넣게 놔두라고 비웃었다. 또한 대응 하나하나에 부동산 용어와 지식을 더해 메시지 초안을 써서 보내주셨고, 가족으로 위장해 대신 통화를 해주시기도 했다.
이 단계에서는 정말 싸움을 그만하고 싶었다. 간단히 요약했지만 하루종일 카톡과 문자, 통화에 시달리며 싸워야 했던 길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 모든 싸움을 최전선에서 감당하는 일은 너무 버거웠고 갈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싸움이 길어질수록더 이상 일상에서도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살면서 누군가와 이렇게까지 싸워본 적도 없었거니와, 오히려 싸우는 게 싫어서 웬만하면 조용히 넘어가는 편에 속했다. '여기서 멈춰야 하는 걸까'라고 노트에 수없이 적었다. 내가 옳은 판단을 내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회사 근무 시간에도 전화를 받고 나가서 싸웠고, 점심시간이면 밥도 안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미친 듯이 정보를 뒤졌다. 어떤 날은 화장실 앞에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동료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죽을 거 같아요."
"처음에는 월세를 아낄 수 있단 생각에 너무 기뻤거든요."
"이사하고 자녀 계획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부부 사이만 나빠졌어요."
피해자 인터뷰 내용들이 너무 와닿았다. 나 역시 친구와도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내 이름으로 계약한 거라, 연루된 모든 프랭크 무리가 나에게 연락해 왔고 어떻게든 가장 어려운 싸움은 내가 직접 해야 했다. 친구는 처음에는 동등한 입장에서 점점 도와주는 입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면서 크고 작은 오해가 생겨났다.
이 시기에 나는 정말로 조금은 실성했던 게 아닌가, 하고 지금도 생각한다. 얼빠진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 공원에 앉아 초점 없이 이상한 혼잣말을 하는 사람, 혼자서 울다 웃다 발을 동동거리다 화를 내는 사람, 야심한 시간에 한 곳만 바라보고 동상처럼 앉아있는 사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폭풍만 보느라 자기가 정신을 놓아버렸는지도 모르는 사람,
맞아,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지?
근데 그게 지금 나잖아?
회사에 다니면서도 매일매일 자정이 넘도록 바깥을 배회했다. 어느 날 밤 공원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한 엄마랑 아기가 나를 피해 가는 걸 보았다. 나는 그 엄마의 시선을 보고 '내가 드디어 정말로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한 건지 말로 한 건지 그조차 모르겠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뜨악하고 경악스러운 현실 속에서 아무것에도 이길 자신이 없어서, 너는 왜 씩씩하지 못하냐고, 뭐든지 강하게 하는 건 왜 못하냐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떠는 거냐고, 나를 욕하고 또 욕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름, 지명, 금액 등의 세부적인 정보는 특정을 피하기 위해 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카톡 이미지 또한 캡처본이 아니며, 실제로 오고 간 대화를 토대로 요약하고 재구성해 제작했습니다.
이 과정이 가장 긴 기간이었던 것 같네요. 당시의 일기장은 원한과 비명으로 종이가 찢어질 듯합니다. 현재도 전세사기가 해결되지 않아 힘든 분들이 많기에 자칫 요란스럽게 비칠까 염려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을 되돌아보며 요약하고 다듬어 감히 모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