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주는 내용증명을 수신한 뒤 확실히 답장이 좀 더 자주 왔는데, 무슨 이유인지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굽히고 들어왔다. 여전히 남 이야기 하듯 말하는 '유체이탈 화법'이었으나, 프랭크나 스티븐과 싸울 때보다는 좀 더 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물론 서로 연기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건축주의 마음이 갑자기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기꾼 작당 무리 하나하나를 압박하고 들쑤신 효과가 있었던 건지, 자기들끼리도 내부적으로 논란이 있었던 건지, 나에게 조력자가 많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뭐든 어쨌든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리고 며칠 뒤 프랭크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간과 장소까지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보내온 연락이었으나, '금전소비대차' 작성이 아닌 '계약 파기' 쪽으로 얘기가 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말싸움을 벌이지 않고 가겠다고 답장했다. 최종 결판의 날, 나와 내 친구 소울, 시민 단체(민달팽이유니온)의 두 분이 친구로 위장하고 동참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들어가기 전, 나와 소울은 아침 일찍 카페에서 만나 결기를 다지며 원본 서류를 복사했다. 물론 스네일 씨가 동행해 주기로 했지만 이런 대면 싸움은 처음이었기에 여전히 불안했다. 변호사 님과 중개사 브라더 씨 또한 동행해 주려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았고, 대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신고해 주기로 하고 밀접하게 연락 유지했다. 오늘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사무실에서 몇 날 며칠 돌아가면서 누워 자겠다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의 소굴 속으로 걸어갔다.
Rec.
녹화 버튼을 누르고 현장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가짜중개사 프랭크 및 컨설팅 업체 직원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 단체전이다. 혼자 갔으면 어쩔 뻔했는지. 컨설팅 업체 직원 스티븐은 우리를 보자마자 큰소리를 치면서 순식간에 주도권을 가져갔다.
스티븐: 원래는 우리가 계약금 돌려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묻는 말에 대답해 보세요. 대출이 나오는데 왜 협조를 안 해요?
우리는 "열 군데 넘게 은행을 갔으나 대출이 안 됐고 소개해 준 대출상담사는 연락두절 됐으며, 새로운 대출 은행명은 안 알려주지 않았냐, 그러니 계약 파기가 당연한 거다"라고 대답했다. 스티븐은 내가 아닌 친구가 설명하려 할 때마다 목소리를 크게 높이며 말을 못 하게 잘랐다.
스티븐: 당신은 말하지 마세요. 계약자 아니잖아.
친구1: 본인도 계약자 아니시잖아요.
스티븐: 나는 모든 걸 위임받고 하는 대리인이야.
친구1: 대리인이시잖아요. 임대인 따로 있으시잖아요.
스티븐: 가만있으라고. 내 얘기 먼저 들으세요. 지금 화내자고 만난 거 아니잖아요.
친구1: 지금 화 내시잖아요.
스티븐: 아 가만히 계시라고. 본인이 계약자예요?
스티븐은 영악하게도 오직 계약자인 나만 말하라고 강요했다. '법적 본인'의 발언만 유효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작전에서 나는 중요한 포인트 외에는 말을 아끼는 역할이었다. 모든 것은 녹음되고 있었다. 스티븐은 우리 모두에게 훈육하듯 소리쳤다.
스티븐: 계약을 실수로 했으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도와주세요라고 해야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개념이 없어서 다짜고짜 예의 없이 계약금 돌려달라고 해! 그럼 계약서를 뭐 하러 써? 계약이 장난인 줄 알아? 인간적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잘못을 빌고 부탁을 해야지, 어디 건축주 사장님한테 버릇없이 딱 전화를 하고 법적 대응을 운운해? 지금 우리한테 명령하는 거야? 어떻게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
살면서 수많은 꼰대를 만나봤지만 꼰대의 끝판왕을 눈앞에서 제대로 보니 정말... 말문이 막혔다.
스티븐: 암만 세상이 바꼈다고 해도 그렇지, 고생해 주신 프랭크 씨랑 우리 싹 다 무시하고 그러면 지금 우리 입장이 뭐가 되냐고. 그러니까 죄송하다고 분명히 말을 하고 사정을 하라는 거야. 세상 그렇게 살지 마세요.
사실 우리 같은 물러 터진 일반인이 말싸움에서 스티븐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시민 단체 친구들은 맷집이 있어 순순히 입을 닫지 않았다. 스티븐은 심지어 메모장에 필기를 하는 것 가지고도 꼬투리를 잡으며 기를 죽이려고 했다.
친구1: 저희 그런 훈계 들으러 온 거 아니고요, 계약 해지 해준다고 해서 왔습니다. 지금 자꾸 인간적으로 살라고 얘기하시는데
스티븐: 당신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지금도 봐, 어디서 사람이 말하는데 메모장을 꺼내놓고 있어!
친구1: 메모장 꺼내는 게 그렇게 화내실 일이에요?
이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우리끼리 풉 웃었는데, 그 때문에 스티븐은 더 열받은 듯했다. (메모장이 무슨 죄야?) 스티븐은 즉시 타깃을 나로 변경했다.
스티븐: 계약자는 회사 다녀봤어요? 지금 당신은 직원들 다 무시하고 회장님한테 직접 전화한 거랑 마찬가지야. 알겠어요?
나: 저한테는 회장님이 아니라 그냥 임대인입니다. 임대인의 대리인이 있다고 해도 어쨌든 임대인 분 통장으로 돈을 보내드렸고요. 프랭크 씨가 아무 요청도 안 들어주시고 계속 비협조적인 취급 하시니까
프랭크: 취급? 처음부터 한 게 뭐 있어요? 계속 딴지 걸고 거짓말만 했잖아요?
나: 취급하시니까 내용증명을 보낼 수밖에 없죠.
친구3: 아무리 대리인이 있어도 저희도 임대인이랑 직접 얘기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
하나 둘씩 말싸움에 참전하면서 점점 난장판이 되어갔다. 시중 은행에서 대출이 안 되는 이유, 대출 상담사가 도망간 사건에 대해서도 한참 설전을 벌였다.
친구2: 대출 미협조라고 일방적으로 몰아가시면 저희는 좀 억울하죠. 그럼 처음에 계약금을 왜 보냈겠어요? 수천만 원 갖고 논 거예요? 아니죠, 저희도 들어가서 살려고 돈 낸 거잖아요.
스티븐: 아니 그래서 이사 안 오실 거잖아.
친구1: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온다고요.
스티븐: 아 답답해라, 말이 안 통하네.
스티븐2: 지금 계속 감정 상하게 말하시네요. 와서 좋게 좋게 부탁을 해도 부족한 판에. 싸우자는 거예요?
나: 싸우러 온 거 아니고요, 대출 거절 됐으니 임대인 분께서 계약금 돌려주신다고 해서 온 겁니다.
프랭크: 대출 되면 지금이라도 들어오겠다는 의사로 들리네요. 들어올래요?
스티븐: 지금 프랭크 씨도 하루종일 맞춰주고 집 소개해주느라 얼마나 고생 많이 했어요. 와서 몇백만 원이라도 드리면서 죄송합니다 해야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