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 티셔츠를 꺼내며

퇴사, 그 후

by 세라

겨울옷을 정리하고 반팔 티셔츠를 꺼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일주일 전 친구 H와의 약속에 "코트를 입고 나가도 되냐"라고 했을 때 친구는 기겁을 하며 잔소리 100개를 퍼부었다, 너는 도대체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 거냐고, 지금 있는 곳이 정말 서울이 맞냐고. 산책은 나가지만 대부분은 오후 어스름께 나가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응달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을 때가 많기 때문에 나는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여름이었다. 사람들은 반팔, 반바지, 심지어 몇몇은 미니 선풍기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오월에 아직도 털양말을 신고 전기난로를 켜고 사는 나는, 친구가 보기에 산꼭대기에 은거하는 기인이나 다름없이 보였을 것이다. 나는 밥처럼 익숙하고도 아늑한 고독 속에서 생활을 단순화하고, 긴 정중동의 시간을 누렸다.


오랜만에 책에서 눈을 뗐다. 낱말과 이미지의 바닷속에서 하염없이 몽유하는 버릇을 의식적으로 자제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감정을 덧씌우지 않고 바라보려 노력해 본다. 겨울 코트와 패딩을 정리해서 세탁을 맡겼다. 긴팔 재킷의 계절은 이미 지나가 있었다. 다행히 반팔 티셔츠는 충분히 있다. 가을·겨울 옷은 직장인 위주의 옷밖에 없어서 편하게 입을 만한 옷이 없었더랬다. 극세사 이불 패드를 세탁기에 넣고 수위를 최고조로 설정해 돌렸다. 세탁기 앞에 서서 이불 전체가 물에 젖어가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빨래통이 시계방향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번갈아가며 힘차게 돌아갔다.


빈혈이 심하다. 산책 중 어지러워서 주저앉을 뻔 한 순간이 자주 있었다. 키 큰 아카시나무들이 빙빙 돌았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속도를 늦추어 집으로 엉금엉금 돌아왔다. 이렇게 바닥난 체력으로 내가 가장 열심히 해온 일이 지근거리에 있는 숲 산책이었다. 싱싱한 초록과 청청한 파랑은 언제나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두 달이 흘러갔지만 사월과 오월은 다음의 단어들로 기억될 것이다. 산수유, 개나리, 벚꽃, 살구나무, 진달래, 꽃잔디, 목련, 철쭉, 조팝나무, 라일락, 이팝나무, 황매화, 백리향, 등나무, 박태기나무, 아카시나무, 병꽃나무, 수선화, 금낭화, 산딸나무, 꽃창포, 수련잎, 작약, 그리고 부드러운 바람, 공기의 흐름……. 그래, 치욕의 시간은 이제 그만 잊어도 좋아. 아니, 글을 쓰지 않는 모든 순간에 나는 이미 잊었다. 글에서만, 글에서만 지우면 모든 게 끝나리라……


지우자.


라고 쓰는 순간, 눈동자가 떨린다. 유독한 성분이 거의 다 빠져나간 슬픔은 묽고 따듯하다.


스팀다리미로 구겨진 반팔 티셔츠들을 차례차례 폈다. 시간의 흐름이 더 선연하게 느껴진다. 오늘부터는 그동안 쓴 글을 퇴고해야겠다. 끝까지 붙잡고 성의 있게 완성해야겠다. 앞으로는 마음가짐을 좀 더 정려하게 하고, 밝고 단아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본다.


그래도 밤엔 아직 손발이 시리다. 전기난로는 조금만 더 있다 넣어야겠다.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자취방 냉장고시. 이번 주간은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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