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사탕이 되어주기로 해요

퇴사, 그 후

by 세라

찬 바람 불던 어느 오후,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는 여전히 수많은 대기업과 빌딩들이 건재하고 있네요. 오후의 햇빛을 근엄하게 반사하는 로고들 아래를 지나며, 조만간 제 이력서에 또 하나의 로고를 새겨 넣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중 아무 데도 날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상투적인 두려움이 한데 뒤섞여 부풀어 올랐습니다. 도시에는 이렇게 많은 회사가 있으니 어디든 한 군데는 갈 수 있을 거라는 거, 착각이란 거 모르지 않으니까요. 내 한 몸 뉘일 단칸방 하나 구하기 힘들어 너털너털 돌아다닌 세월이 가슴 한구석을 쓰리게 합니다. 도시에 사는 일, 적이 어렵습니다.


저의 힘겨운 퇴사 시즌을 함께해 주신 분을 만났습니다. 가슴속에 사표 한 장 품고 사는 한 사람과, 그 사표 이미 꺼내서 내던진 한 사람. 우리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기껏 한다는 말은 그래봐야 이런 것이죠. "이 건물에 있는 회사 전부 다 망했으면 좋겠어요." 빌딩과 로고들이 우리 뒷담을 듣고 말았을까요? 아무려야 어때요, 겨우 이런 말 몇 마디가 회사를 무너뜨릴 리 없잖아요. 빌딩들은 견고하고요, 말들은 흩어집니다. 보세요, 어차피 바수어지는 건 우리 쪽이에요.


저보다 조금 늦게 구조 조정을 당한 후배도 만났습니다. 가장 먼저 잘린 사람과 두 번째로 잘린 사람. 얼마만큼 시간이 지나야 회사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냐는 질문에, 저는 다소 거만한 자세로 대답해 주었죠. "난 벌써 다 잊었는 걸? 거 일단 말야, 오늘부터 침대와 한 몸이 되도록 해."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는, 그러나 저도 장난일 수 없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은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똑같습니다. 선배랍시고 뭐 있나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부끄러움뿐이에요. 세 번째로 잘릴 사람도 그럴 겁니다.


난 이 두 사람에게 예쁜 사탕을 사주고 싶었어요. 투명하고 동그란 병에 색색의 사탕을 담아 포장했습니다. 그런데 사탕 받은 두 사람의 표정, 왜 그렇게 똑같던지요. 그 표정을 박제해서 사탕의 얼굴로 만들고 싶을 만큼요. 그러면 사탕 하나씩 꺼내 먹을 때마다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재미,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사탕 앞에서 멈추는 당신들의 표정, 그 표정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 아니겠어요. 풋, 결국 이렇게 생색을 내고 맙니다. 나 좋자고 글 쓰는 거지요 뭐. 에이, 그러지 마시고 좀 웃어주세요.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우리는 서로의 사탕이 되어주기로 해요. 저는 당신의 표정만을 받아 적겠습니다. 투명한 병 속에는 호시절만이 담기겠지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