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어떤 글을 써야 할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퇴사 후 끝내 자유를 얻었으니 나는 이제 하늘을 나는 기러기처럼 가벼운 글을 쓸 수 있겠지? 나도 남들처럼 친구도 만나고 예쁜 카페도 가고…… 물론 그런 날도 있었다. 산책하면서 조각조각 메모했던 꽃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 시, 그리고 다정한 악상들도 노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나의 내면은 여전히 유독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매번 지울 수밖에 없었다. 충격도, 적의도,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는데 나는 왜 조금도 착해지지 않았지? 나는 단순히 한 번의 실패나 여러 번의 실패로 인해 절망의 독성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젠가부터 내가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태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저런 불행을 겪기 훨씬 이전부터 유독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불행은 수동적인, 겪는 상태이다. 반면에 저주는 그와는 반대로 능동적인 선택을 전제한다. 그 선택은 소명 의식과 내면의 힘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저주는 불행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에밀 시오랑
나는 그동안 힘든 시절을 버티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오직 생존을 위해서 글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글쓰기는 인생의 불행에 대항하는 '방어'가 아니었다. 막고 피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던지고 때리고 내지르는 글쓰기. 나는 언제나 내 삶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오랑에 따르면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쓰는 동안 한 번도 불행한 적 없다. 어쩌면 절망의 살갗을 찢고 나오는 저주야말로 삶에 대한 까마득한 낙관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게 명랑한 척할 필요도, 작위적인 우울에 빠져들 것도 없다. 밝은 것은 밝은 대로, 어두운 것은 어두운 대로, 쓸 것. 중요한 것은 '쓸 것'. 지금까지는 직장과 사회에서 불거진 수많은 문제들이 나의 자아를 불러 내어 멱살을 붙잡고 쓰게 했다면 지금부터는 반대로, '내가' 그것들을 불러내는 방식으로 쓰겠다. 감히 그것들에게 주어조차 넘겨주지 않겠다. 이제 내가, 내 발로 걸어 나갈 것이다.
위의 글은 7월 7일 현재 충동적으로 썼다. 휴식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으나 글로 잘 옮겨지지 않았다. 글쓰기의 충동성, 나는 늘 이게 문제다. (나는 소설 쓰기는 습작조차 어렵다.)
다시 첫 번째 글이다. 이미 여러 매거진을 만들어 놓은 탓에, 따로 매거진을 개설하지 않고 [실시간 퇴사로그]에 이어 쓰기로 한다. 처음에는 [어느 고독한 백수의 사색]이라는 제목을 써 두었는데, 블레즈 파스칼의 고전 <팡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어느 고독한 백수의 팡세]로 수정해 보았다. 강한 파열음의 여운과 이국적인 신선함, 그리고 은근히 희망적인 단어의 생김새가 마음에 든다. 팡세(Pensées)는 프랑스어로 '생각'이라는 뜻으로 사색집 또는 명상록으로 번역된다.
('팡세'라는 단어를 좇다가 에밀 시오랑까지 왔다.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 그의 문장들이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