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당신 삶 속에

퇴사, 그 후

by 세라

여섯 번째 실업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다시 깊은 우울의 수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날 밤, 한동안 끊었던 술에 다시 손을 댔다. 시답잖은 농담을 떠들어댄 건 다섯 번째까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방구석에 앉아 취한 채 바깥 세계를 탓하는 것, 늘 하던 대로, 그뿐이었다. 다음날 출근할 곳이 없었던 나는 한순간 내 주량을 넘기고 말았고, 책상 앞에 구겨진 채 정신을 잃기 전까지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과거, 나를 잊어줘.


이틀 동안 몸속의 모든 장기를 토해낼 듯 지독한 숙취에 시달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 버릇처럼 글을 지우고, 처음으로 읽은 책은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였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이런 문장이 있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과거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을 때, 과거를 딛고 일어나는 일이 자꾸 실패로 돌아갈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 그것도 아주 평범한 미래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편집기 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순서대로 올려놓고 Reverse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거꾸로 흐를 것이며 인과 관계 역시 반전될 것이었다. 작업은 간단했다. 그리고 재생.


그러자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졌다. 타임라인 위에는, 내가 어리석게도 어떤 일에 남김없이 열정을 퍼부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소모된 채 버려진 우울한 이야기가 아니라, 긴 어둠과 잦은 실망, 수없는 회복의 시도 끝에 오랜 사랑을 이루어내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맨 처음의 내가, 온전한 내가, 시퀀스의 끝에서 기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이미 내가 찍어온 삶의 필름 속에 모두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플레이헤드가 멈추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필름을 찢어버리려 했던가.


방구석에 앉아 혼자 침울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한, 나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용서하지 않아도 되었다. 용서하지 못해도 되었다. 대신,


이제 과거에게 그만 애원할 것.

보이지 않는 미래를 첫 순간처럼 꿈꾸며 살아볼 것.

어떤 괜찮은 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결말 지었다. 우리는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면 평범한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에 수렴한다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내 방에서 책을 읽는 걸 더 좋아하지만, 오늘 오후는 책을 들고 카페에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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