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의 휴식

[어느 고독한 백수의 팡세] #14

by 세라

고프다. 배고픈 백수는 터벅터벅 냉장고로 걸어간다. 뭐 먹지. 냉장고를 스캔해 본다. 냉장고 겉면에 잔뜩 붙여 놓은 시는 '공간 부족' 수준인데, 안쪽에는 (당연히) 싸늘한 냉기만 흐른다. 남아 있는 건 달걀과 열무김치, 보리차 티백, 스파게티 소스, 그리고 직장인 시절에 사 모은 각종 소스. Ex.) 마요네즈, 굴 소스, 멸치 액젓, 발사믹 글레이즈드, 우스타 소스, 오리엔탈 드레싱 . 충분했다. 왜냐하면 나는 몹시 배가 고팠으므로.


백수의 밥상을 구색 갖춰 차리기에 식재료 물가는 잔인한 수준이었다. 가장 아쉬운 건 과일이었다. 과일은 비싸기도 할뿐더러, 작은 단위로는 잘 팔지도 않는다. 나는 누룽지를 끓여 먹고, 지인이 잘 안 쓴다는 브리타 정수기를 받아 수돗물을 정화해 마셨다. 커피 두 잔 값으로 원두 한 봉지를 사면 2주를 버틸 수 있었고, 명절 때마다 회사에서 받아 쌓여 있던 가공 햄을 활용해 깍둑 썰은 오이와 간장 양념과 밥을 비벼 먹었다. 특히 국수 소면에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양념하고 열무김치를 잘라 넣으면 더 부러울 것 없는 여름 별미였다. 올여름 내 주메뉴는 열무국수와 열무비빔밥, 그리고 한두 개의 자연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요리였다. 열무김치를 싸게 충당하기 위해 재래시장을 돌아다녀 봤는데, 그것만은 쉽지 않았다더라. 허나 가난한 식탁에도 술 한 잔의 낭만은 있었다 하니, 그걸로 되었다 하더라.


나는 내 빈약한 밥상에 상당히 만족했다. 지난 3월에 실업과 동시에 금리 폭등까지 맞으며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한 탓이기는 했지만, 나는 분명 잦은 외식에 질려 있던 터였다. 온갖 유명하다는 맛집, 트렌디한 빵과 쿠키와 케이크, 건강식이랍시고 터무니없이 비싼 고급 샐러드, 술과 기름진 안주, 하루에도 몇 잔씩 테이크아웃하는 프랜차이즈 커피…… 여의도 직장 생활 중엔 특히 심했다. 먹고 싶지 않은데도 먹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높은 상사가 내린, 타 부서에서 보내온 사교용 디저트를 먹어야 할 때, 배가 안 고프답시고 짬도 안 되는 주제에 혼자 고상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더 먹고 싶지만 일어나야 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여기저기 애꿎은 눈치만 받다가 버려지는 화려한 음식들, 그 음식들이 쿨하게 치워지고 버려질 때,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거금을 결제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카드를 내미는 것이 마치 사회생활의 기본 매너인 마냥, 딱히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을, 함께 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과 나눈 그 순간들에, 내가 느낀 감정은 결코 행복이 아니었다. 나는 새벽에 여유 있게 출근해서 혼자 창가에 앉아 김밥 한 줄과 함께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가 가장 행복했다. 퇴사 후 그 일대에서 그리운 음식이라면 동틀 무렵 옅은 햇살에 참기름이 반짝이던 김밥뿐. 아, 김밥! 내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던 그 김밥!……


풍요와 호사 속에서도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정현종 시인도 이렇게 썼다. '배도 안 고픈데 세끼를 먹겠다고 먹으니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 이렇게 단출하게 지내다가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외식을 하면, 그때야말로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텅 빈 위장이 세계도 텅 비게 하여' 내 마음이 광활해진 탓이리라. 적절한 시장기를 갖춘 뒤에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직접 차리고 치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아무렇게나 섞고 비빈 요리가 아닌 전문적인 맛의 조합을, 1인 가정으로서는 만들어 먹기 힘든 귀한 음식을…… 그때야말로 기다려졌다. 외식을 한다면 이런 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 중에는 이 당연한 것들이 왜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배가 불러도 '살맛'이 나지 않았다. 산해진미 앞에서도 '죽을 맛'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레스토랑과 술집에서 무참하게 버려진 음식뿐일.


일하는 몇 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이유를 알 수 없던 아토피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무리 식사와 수면 패턴이 꼬이고 술을 자주 마셔도 회사에 다닐 때처럼 엉망이 되지는 않는다. 내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청정한 시골로 가거나 채식으로 바꾼 것도 아닌데. 무언가가 괜찮아졌다는 뜻이다. 도시인들이여,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운 시장기>

정현종


가난하던 시절에는

배가 고팠고, 그래서

음식도 맛있었는데,

요새는 배고플 새가 없으니

이게 실은 문제이다.


배도 안 고픈데

세끼를 먹겠다고 먹으니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


시장기를 느낄 때 우리는

얼마나 신선한가!

시장기를 느끼는 순간

살맛이 나고,

텅 빈 위장이

세계도 텅 비게 하여

세계는 얼마나 광활해지는가!

즉시 어디에라도 갈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모험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거두절미, 신선한 기운이 샘솟는다.

좀 굶어야겠다,

그리운 시장기여.



냉장고 공간 부족 사태(!)
세라네 단골 메뉴, 오이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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