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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07. 2023

독서라는 이 미친 짓

최소한의 인간다움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날 때마다 책에 의지했다. 책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책에 마음을 기대면 기댈수록 논리적인 사고가 마비되어 문장이 아닌 단어와 이미지만을 파편적으로 건너가는 이상한 독서에 익숙해져 갔다. 읽지 않고 읽었다. 문장들은 다만 내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질뿐. 나는 여백 속에 유령처럼 서서 무수한 문장들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그 또한 독서의 한 스타일이라고, 난독이야말로 고독의 한 증상이 아닌가, 라면서.


한 줄 한 줄 가지런히 정렬된 문장들이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이 문장에, 저 문장에, 거의 문란하게 내 존재를 걸었다. 나는 왜 미쳐지지 않는지, 나는 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지, 글 속에서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던가. 너무 시끄러운 문장들. 꼬일 대로 꼬인 심사로 쓸데없는 메모를 남발하면스스로 수치스러운 기억을 되짚고 있는 우스운 꼴이라니. 짜증난 문장들이 스스로를 뚝뚝 끊어낼밖에.


미쳐버리고 싶은 건 정말로 진심이었다. 콱 정신 나간 여자가 되어서 불가피하게 보살핌이라도 받거나, 아무데나 감금이라도 되거나, 세상으로부터 완전하게 격리되고 싶었다. 애매한 관심과 어중간한 낙오는 나를 미치지도 못하게 한다. 참담하다. 내 정신의 마지노선을 갈아 부수고 싶다. 문장에서 단어로, 단어에서 음절로, 그 어떤 의미도 깃들 수 없는 파편이 될 때까지. 쓰기로부터, 읽기로부터, 대체 언제 떠날 거니?


불면이나 오열, 술독으로 거의 탈진에 이른 상태일 때조차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친다. 도대체가 끝의 끝까지 나로 하여금 읽고 쓰게 하는 지성과 욕구는 너무나 사이코패스적이다. 문장들아, 나를 위로하지 마라. 책이여, 제발 나를 놓아다오. 내 이리 부탁하니. 의사들이여, 나는 결코 고요하지 않다. 믿어 달라, 내 정신에 모르핀을 놓아달라. 나에게서 책을 뺏어달라. 나를 독서를 방해해 달라.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미쳐지지가 않는다. 정말로 미쳤다면 책 같은 건 한 장도 읽지 못해야 마땅하다. 나는 언제나 평정한 선승처럼 가만히 앉아 읽기만 한다. 나는 책 읽는 나 자신으로 인해 불안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이 파렴치한 열정을 멈추지 못한다. 책 한 장 찢어버릴 객기도 없으면서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고, 정말 그만 살고 싶다고,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방식으로 포효한다. 지겹다. 이 지옥 같은 문학만이 나의 구원이라는 사실이. 이게 구원의 다라는 것이. 구원이 고작 이런 거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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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잠시 광화문 교보문고에 다녀왔다. 언젠가 선물 받아 마지막 보루처럼 꿍쳐 두었던 상품권으로 책을 샀다. 책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가지고 싶은 시집들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이 미련한 행위만이 나에게 허락된 최대치의 구원이리라. 돌아오는 길에 책들을 무슨 아기라도 되는 양 품에 꽉 끌어안고 왔다. 어떤 바람에도 구겨지거나 찢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책의 네모나고 딱딱한 물성이 가득히 느껴졌다. 이렇게나 열렬한 내 꼴이 우스워서 시컴해진 하늘을 바라보는데,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저녁은?" 눈물이 찔끔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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