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ebla#6
돌아온 Puebla에서, 하루는 친구를 만나고 하루는 비를 맞고 하루는 대성당을 기웃거리고 하루는 혼자 까페떼리아에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는 밤을 거닐고 하루는 갔던 곳을 또 가 보고……
역행해서 돌아온 만큼이나, 놓치고 간 것들을 담아내는 날들이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보지 못하고 지나쳐 온 것들을 수없이 주워 담으며, 고개를 들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니 익숙하고도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다. 여기가 이렇게 예쁜 곳이었나?
사람도, 도시도, 오래 보아야 예쁘다.
지금부터의 글과 사진들은 다시 보고, 오래 보고, 새롭게 본 장소들이다.
2번이나 돌아온, 그러니까, 3번째 방문인 이곳에서 나는 지리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갔다.
오늘은 맑음
드디어 내게 화창한 날을 허락해 준 이 도시. 나는 비가 왔을 때 가장 아쉬웠던 '예술가의 거리'에 다시 들렀다.
곧게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 거리에서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비오던 날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방마다 다른 화풍의 예술 작품들이 펼쳐졌다. 작업에 몰두한 화가의 모습을 부끄러움도 없이 마음 놓고 바라 보기도 했다.
달팽이처럼 방 속에 숨어있던 미술 작품들이, 오늘은 광합성을 하려는 듯 오밀조밀 앞다투어 나와 있다.
거봐, 돌아올 거라 했지?
촉촉하게 젖어 있던 거리는 바삭하게 마른 빨래처럼 다시 태어나 있다. 나는 돌아온 이곳에서 비로소 도시가 지닌 수많은 표정들을 본다.
아래는 흐린 날 찍은 예술가의 거리에서 찍은 사진.
Santo domingo 성당 근처는 블록 블록마다 온통 시장이었다. 산책 겸 발걸음 닿는 대로 돌아보면서, 관광화되지 않은 쪽까지 구석구석 펼쳐진 상권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책 노점상이 눈에 들어왔다. 보다 보니 내가 스페인어 공부를 할 때 읽었던 똑같은 소설책이 있길래 가격을 비교해 보려고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소설책에(사실은 가격에..) 몰입해 있던 중, 두 명의 멕시코 청년이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들은 시장 바닥에서 동양인이 책을 보고 있는 광경에 퍽 궁금증이 동했던지, 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나는 마침 전통 수공예품을 파는 시장 쪽을 가보려던 참이어서, 길도 안내받을 겸 그쪽까지 함께 걸어갔다.
중간에 한 명은 먼저 가고, 끝까지 동행한 이는 미카엘(Michael)이라는 아이였다. 그는 아시아 문화에 무척 관심이 많은 대학생이었는데, 실제로 그가 이야기한 것 중에는 애니메이션 등 일본 관련이 좀 많았다. 뭐.. 나는 꿋꿋이 한국인임을 어필했지만 여전히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여행 중 알게 된 친구의 추천으로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이라는 홈 셰어 어플에 가입해 두었는데 한참 뒤에 다시 들어가 보니 Puebla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길에서 만난 이들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에 대해 관심 있는 멕시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미카엘이 사진을 찍어준다기에 내가 찍어준 거랑 똑같은 구도로 찍어달라고 했다. 몇 장 찰칵찰칵 열심히 찍길래 확인해보니 이렇게 한쪽 구석으로 몰아서 찍어줬다. (이 사진이 가장 안정권으로 들어온 것. 물론 수평 보정 한 사진.) 그래도 초점 안 나간 게 어디야?
도착한 시장에는 정말 '멕시코스러운' 물건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된 만큼 마음에 드는 작은 기념품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Puebla는 특히 질 좋은 도자기로 유명한데, 이 시장에서 다양한 디자인과 그릇 종류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멕시코 전통 인디오 인형이나 솜브레로(Sombrero, 모자) 같은 것들은 다른 지역 어딜 가나 볼 수 있긴 하지만, Puebla가 제일 다양하고 저렴했던 것 같다. 도자기로 만든 모자 피규어들도 다양했다. 특히 모자 열쇠고리와 마리아치 모양의 자석이 딱 멕시코스럽고 부피도 작아서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나와 지인들을 위한 기념품들을 몇 개 샀다.
아래 사진들은 총칭 '멕시코스러운 것들'
사실 어느 가게에서 이것저것 만져 보다가 실수로 하나를 깨뜨려 버렸는데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가 괜찮다며 돈을 받지 않으셨다. 그 집에서 나무로 된 미니 솜브레로 열쇠고리를 샀다. 그 나무 솜브레로는 내가 가장 자주 쓰는 열쇠의 손잡이가 되었다.
미카엘과는 쏘깔로에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 작별을 고했다. 그는 아쉬워했지만, 여유로운 여행을 즐기기로 한 나에게 이제 '낮잠'은 필수 일정이 되어버렸다. 미안, 이제 낮잠 자러 갈 시간이야.
미카엘과는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나중에 그의 아시아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길을 안내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갚을 수 있었다.
낮잠을 자고 나와서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 앞을 지나가던 참이었다. 컴퓨터 화면에서 Puebla 풍경들의 화면보호기가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한참 화면보호기를 보고 서 있던 나는 직원에게 몇몇 풍경을 어디서 볼 수 있냐고 물었고, Teleférico라는 것이 있다는 것과 찾아가는 버스까지 안내받았다. 먼저 물어보면 주로 박물관과 시장, 주요 성당 등을 안내해 주는데, 케이블카를 찾아낸 것은 나의 통찰력(?)이었다. (정보를 내놓아라!)
오후에는 다시 날씨가 흐려졌다. 하지만 딱 비 내리기 직전까지만 흐려졌다. 그 결과, 내가 좋아하는 우중충하고도 선선한 날씨가 되었다.
케이블카의 좋은 점은 한눈에 도시를 전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편까지 타고 갔다가 내려서 그쪽 지역을 구경한 뒤 아무 때나 원할 때 다시 타고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대편에는 박물관과 기념탑, 까페들이 있어서 천천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양쪽은 멀지 않아서 걸어서도 충분히 돌아올 수 있는 거리다. 나는 해지기 전 반대편으로 넘어갔다가 어두워질 때쯤 돌아오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시간이 늦어져서,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할 때였고 박물관도 막 문을 닫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근처에서 까페를 찾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공원의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전망 좋은 카페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외에도 두 군데 정도 더 있다고 했는데, 내가 간 곳도 충분히 좋았다.
테라스에 앉아 채 다 넘어가지 않은 빛들이 구름 사이로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먹구름이 노을빛을 차례대로 삼키고 있다. 마지막 빛줄기가 사라진 뒤 구름 아래의 세상은ㅡ 암전.
원래는 커피를 한잔 할 생각이었지만, 빛과 어둠의 경계가 내뿜는 거짓말같은 풍경에 취해 멕시코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맥주를 마셨다. 그것도 보헤미아 Clara와 Oscura, 2병이나.
밤이 아름다운 것은 어둠 때문이 아니라 빛 때문이라 했던가. 이 기념탑은 낮보다 밤이 훨씬 아름답다. 암흑의 밤 속에서는 스스로 빛나는 것들만 남아 있다.
나는 겁도 없이 술을 먹고 어두워진 멕시코의 밤을 즐기다가, 버스정류장을 찾기 귀찮아서 택시를 타고 쏘깔로로 돌아왔다. 내려서도 호스텔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쏘깔로와 대성당 주위를 산책하다가 들어갔다. 사실 택시는 약간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버스를 타고 왔을 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여서 금방 내렸다. (그래도 항상 안전에 유의해야 합니다ㅠ)
Teleférico는 왕복 50페소, 이곳에서 쏘깔로까지 택시비로는 40페소를 냈다.
가끔 방향을 틀어 거슬러 가는 것도 좋겠다.
돌아가 오래 볼수록 예쁜 것들을 보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