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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an 14. 2024

남겨지는 건 차라리 당신

#일기

회사에 다닐 때 유독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있었다. 나이나 경력 차이도 거의 나지 않고 직급도 같았지만, 그는 그 회사에서만 연속 근무했고 나는 여러 동네에서 굴러먹다 들어온 이방인이었기에, 어쨌든 그는 상사였다. 그 회사는 체계와 규칙과 시스템과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면 최소 1년은 걸리는 대기업이었고, 나는 실무 스킬을 제외하고는 신입과 다름없었기에 유일한 또래 팀원이자 직속 상사인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한 번도 그를 넘어서려 한다거나 맞먹으려 한 적 없었고, 오히려 팀장 대하듯 깍듯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부턴가 나를 불편해하고 배제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내 존재를 샅샅이 못마땅해했다.


그는 아침에 인사를 해도 언제나 싸늘한 표정을 지었고, 사소한 말도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날카롭게 상처 주었으며, 가벼운 실수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꼭 한번 더, 주변 사람들이 다 들리게, 상상할 수 없는 세련된 방식으로 비꼬며 망신을 주었다. 어떤 날은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몇 시간이고 의미 없이 대기하게 만들었으며, 휴가 중에 내려온 중요한 공지를 물어봐도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여러 번 불러야 한 번 쳐다볼까 말까였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는, 그와 함께하면 할수록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매번, 매번 더 작아졌다. 그러나 나를 돌아봐줄 때까지, 나는 그를 불러야만 했다. 일을 해야 했으니까.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차라리 그건 고문이었다. 그를 한 번 부를 때마다, 그리고 한 번 외면당할 때마다, 나는 자폐적인 고통으로 깎이고 쏠리고 도려졌다. 외부에 꺼내 놓은 얼굴만 간신히 제하고, 나를 이루는 모든 부위는, 뒤로 뒤로 구역질을 하며 탈진해 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가 주변에 있으면 유독 말끝을 흐리거나 말을 더듬게 되었고, 그러면 또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냐고 무서운 얼굴로 화를 냈다.  한 명으로 인해 그 회사 전체가, 내게는 지옥이 되었다. 일분일초가 긴장과 공포였으므로 하루하루가, 몇 달이, 몇 해가, 언제 채찍이 날아들지 모르는 수감 생활과 같았다. 그가 있으면 나는 자유롭게 웃는 법을 잊었다. 그가 휴가를 쓰면 내가 휴가를 쓴 날보다 자유로웠다.


한번 설정된 관계는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무슨 짓이라도 하면 우스꽝스러워졌고, 무슨 짓도 하지 않으면 우스워졌다. 나는 퇴근길마다 거의 매일, 소리 없이 울었고, 때로는 출구를 통과하기도 전에 몸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나가는 걸 저지할 수 없었다. 그의 말과 표정은 퇴근 후에도 자꾸만 강박적으로 재생되었으며 나는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철저히 불능 상태가 되어 회사에서 집으로 울분과 슬픔을 실어 날랐다. 돌이켜 보면 사람들과 잘 지내고 좋은 기억으로 남은 회사도 많았는데, 그때는 스스로를 영구한 사회 부적응자이자 허약한 정신 병자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버티고 싶었다. 그만두기 싫었다. 지키고 싶고, 가꾸어 나가고 싶은 소중한 일상이, 내게는 있었다. 이직 경력은 많지만 단 한 번도 쉽게 그만둔 적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혹독한 자부심이 있었고, 다시는 상실을 겪고 싶지 않다는 극기가, 거기에 들러붙어, 스스로를 비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만큼 악착하게 만들었다.




'미안하다.' 그토록 오래 나를 괴롭히던 사람에게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퇴사로써 그와의 연은 간단하게 끊어졌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미안해요, 언젠가 내가 이 네 글자로 짧은 시를 썼던 것 같다. 단지 네 글자만으로도 거의 완성에 접촉했다고 여겨지던 그 시를, 나는 이윽고 잊어버렸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다.




깊은 새벽이었다. 책을 읽다가 '미안하다'는 문장을 만났다. 어느 책에서나 한 번은 나올 수 있는 표현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인사가 '미안해'였다고 했다. 나는 이상한 기시감에 그 문장에서 멈추어 서서 기웃거리다가,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소스라치며 넘어지고 말았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나의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 몇 해동안 유독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갑자기 싱거운 소리를 툭 내뱉듯, 헤어지는 인사에 한 마디 담쑥 끼워서, 그리고 왠지 서러운 미소를 띄우며, "미안하다" 그랬었다. 그 말을 듣고 집에 가는 길에는 괜히 모든 게 예사롭지 않게 느껴져 흘러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렁그렁해곤 했다.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면 뭘까. 왜, 왜 세상을 떠나는 존재들은 자꾸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미안하다는 말이 내 안 어디에 은신하고 있었던 걸까. 이제 와서 문득 들올하게 들고일어나는 그 기억은, 놀랍도록 날 것이었다. 오래된 표정이 자아내는 주름과, 특유의 오르내리는 말 음정과, 어미에 잔존하는 여운까지도, 여기에 이토록 자욱한데…… 빽빽한데…… 어째서 나는 단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알았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그렇게도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나는 이미 여러 번 들었음을. 할 수 있는 가장 자상한 표정으로, 순하디순하게, 기억할 때마다 족족이 되살아나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앞에 다가올 날들을 선취하여 들었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듣고 있음을. 책을 덮고, 컥컥 울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로 쓴 시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시인지 조각글인지 모를, 그 글이 이제 와서 궁금해졌다. 사용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메모장을 다 뒤져보았으나, 찾을 없었다. 대신,




다른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삶 구석구석 은신하고 있던 또 다른 미안해들을. 너무 성급하게 쓰여진 미안해들을. 사랑한다는 말과 헷갈린 듯이 쓰여진 미안해들을.


키우다 죽여버린 식물에게 미안해, 깨뜨려버린 카메라 렌즈에게 미안해, 다가온 고양이에게 내어줄 것이 없어서 미안해, 친구가 다친 밤에 아무런 불행도 나누어 주지 못해 미안해, 문장들에게 나를 위로하지 말라며 윽박지르던 일, 미안해, 미안해요, 먼저 인사를 건네준 사람에게 부끄러워 뒷걸음질 친 거 미안해요, 막차가 끊겼다고 친절히 알려준 사람에게 부지불식간 슬픔을 터뜨려버려서 미안해요, 당신이 울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뒷모습을 찰칵 담아버려서 미안해요, 내 생각은 얼마나 했냐는 당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미안했어요,




사는 일이 떠날 날에 근접해 가는 하나의 생래적인 현상에 불과하단 걸 나는 알았던 걸까. 어느 존재의 허약한 미래에 미안하다는 애원으로 남고 싶었던 걸까. 내가 떠나면, 당신은 남겨질 것이다. 당신은 영영 남겨질 것이다. 당신이 나를 떠날 기회를 내가 빼앗아 갔으므로 '영원히 언제까지나' 남겨지는 건 차라리 당신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소리쳐 불러도 듣지 못할 나를, 들어달라고, 무수히 용서해 달라고. 내가, 여기에 있다고.





며칠 뒤, 찾고 있던 시를 찾았다. 무제였다. 봄날 오후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에서 어지러움에 휩싸여 메모했던 일을 기억한다. 그 어떤 소스라침으로 주저앉은 것인지, 그것 기억하지 못한다. 아까시꽃이 흔들릴 때마다 종소리가 흐드러졌다. 반복되는 이별에 대한 생경한 미시감이었을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아릿한 공감각이었을까. 제목조차 붙이지 못한 시를 차마 여기에 다 옮길 용기는 없다. 다만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들을 자격 있다고 생각한 거,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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