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쇠진한 채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늙은 채 태어난 생의 첫날이다. 나는 지난밤 슬픔의 산고를 견뎌낸 오늘의 기형아다. 그 무엇이 나를 깨어나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하는지. 불면은 피로보다 질기다. 멍하니 시를 읽는다. 창틀 사이로 북쪽의 사양이 새어 들어와 옅게, 묽게, 지면을 적신다. 이건 차라리 달빛. 멀고 멀다. 무엇이? 무엇이. 무언가가. 가슴속에 새기려 들지 않고 읽는다. 그렇게, 많은 문장들을, 아니 거의 다,를 놓친다.그 속에서 아주 가끔 어떤 문장들이 나와 연결될 듯이 손을 내민다. 우리 연결되자,면서 갸륵하게 속삭이면서, 꿈틀거리며 근접해 오는 무언가를, 그것을 나는, 만져보기 위해, 뻐근한 몸으로 여기나 곤히 앉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부옇고 자욱한 삶의 구간 속에서,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말갛게 살아있음을, 그저 한 번 확인해 보려는 건지도 모르지.
그러나 모든 문장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내 통증을 조금도 덜어주지 않고, 그렇게 지나가는 문장들도 좋다. 외곽이 사라지는 어느 오후에.
<소설의 숲에서>
주기적으로 소설을 읽지 못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고개를 처박고 폐관해 버리는 자폐적인 기벽 때문인지, 페이지를 넘기는 일조차 하냥 너펄거리는 나비의 날갯짓 같다. 모든 게 허구이자 환각이고 착시다.
읽는다는 건 뭘까. 책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행인1이다. 행인2고 행인3이다. 소설에서는 그런 식으로는 숲에 이를 수 없다. 붙잡고, 물어야 한다. 누구십니까. 여기 어딥니까. 나는 자꾸만 기억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리는 건 실체다. 인물 혹은 사건이다. 나는 궁금하지 않다. 그냥 걸어간다. 행인4고 행인5다. 며칠간 소설의 숲에서 미아가 된 듯했다. 결국 기억이, 나를 유실했다. 나는 시를 불렀다. 시여, 갈피 없는 세계로 날 데려다주소서. 나 그저 안개가 되오리. 출出 없는 로路가 되려니.
그러나 응답하지 않는다. 책 속에는 질문도 없고 대답도 없으므로. 시로도 소설로도 숲에 이르지 못한다. 나는 미아가 되지 못한 미아. 목하 낙엽만 밟는다. 내러티브는바스라진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행인6이 일기장을 펴고 '어디'라는 말을 지워버린다. 가야 하나? 여긴? 그리고 행인7. 그리고 행인8…… 절뚝거리는 하많은 행인.
<에세이의 숲에서>
파편의 조각을 듬성듬성 기워 쓰는 에세이가 있다. 부서진 채로 완전한 글이 있다는 걸 안다. 나는 그런 에세이를 좋아한다.나는 이 책 저 책 표류하며, '더 이상 그만하고 싶은' 한 시절을 의탁한다. 어쩌면 내가 글쓴이보다 더 많이 울었을지도 모른다. 글 속의 슬픔은나에게 현재라는 해일로 발생하고 들이닥친다. 슬픔의원작자는 내 과도한 반응에 당황했을 수도 있다. 나는 난독자처럼 운다. 어쩌나, 나는 당신의 글이 좋은데.
지친 민낯과 거친 비명, 조야한 고백과 쓸쓸한 혼잣말이 좋다.소녀를 홀려 놓고 밑장을 쏙 빼버리는 안경잡이 남자의 아련한 비애나, 사기꾼의 삶 이면에 숨은 가난하고 안쓰러운 진실, 따위를 포장한 소설에는, 구역질이 난다. 나는 속이 좁다.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킬 줄 모른다. 나는 안 괜찮다.모두가 거장에게 박수를 칠 때혼자삐딱하게 등을 돌리고 서 있다.무너지는 억장. 토 쏠리는 내장.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을 지목한다. 저 사람, 날 때렸어요. 저 사람에게 나, 맞았어요.나, 몇 년 동안 새벽마다 울고 있어요. 믿어지나요? 사람이 이렇게 구질구질할 수 있다는 게. 이때소설은 용의자의 천국이다. 나는 용서와 화해에 도무지 소질이 없다. 누락된 은둔자들은여백에 숨어서 울고 있다. 그러므로 이건 글이 아니라 물이다. 원소이자물질이다. 육체이고 감각이다. 가장 점잖은 표현으로는 역시, '에세이'다.
에세이는 내 문제적인 삶과 몹시 밀착된 언어였다. 에세이 속에서는 읽기와 쓰기가 그 요철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뒤섞여버린다. 다가오는 언어도 다가가는 언어도 아닌, 그 자체로양각이자 음각인.한마디로 나는, 삶에서 해결해야 할 급한 숙제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 숙제들을 미뤄두고 소설을 읽다 보면 곧잘 체한다. 다음날 열어 보면 당장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싶을 글을, 일단은 써야 한다. 가쁜체기를 내리고 봐야 한다. 눈 딱 감고 '발행'을 누르거나, 쓰자마자 봉투를 밀봉해 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글을. 세상이 나를 무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무시해야만, 이 글을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다. 나중에 수정하든 삭제하든 일단, 일단, 일단 쓰고 보는 것이다.
내가 쓰는 에세이에는 일관성이 없다. 일관된 주제가 없고, 일관된 기조가 없다. 즐겨 쓰는 단어나 구문은 있지만, 그건 내 문학적 한계로부터 비롯된 작은 버릇일 뿐이다. 내 글은 잡동사니 고물 좌판이다. 나는 그런 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글을 읽다가도, 나와 가까워지는 문장을 만나면 환장하고 달려든다. 머무르고 싶은 마음,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은 항상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나았는데. 거기에다 일어나는 수집욕과 소유욕은 참으로 난처하다. 아무리 필사해도 문장들은 휘발되고, 종내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다는 느낌만 희부윰하게 남는다. 그것은 잡탕떡죽인 내 삶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