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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Feb 18. 2024

면접, 신호등, 겨울

#단상 #메모

1.

면접날, 탈락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말했다. "빨리 가 주세요. 급한 일이 있어서요."


나는 10개월짜리 계약직에 탈락하기 위하여 밥값보다 비싼 택시비를 지불하고, 사실은 늦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늦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탈락 앞에 1등으로 도착해 있었다. 차라리 머리채를 쥐어뜯지 이틀 치 밥값만 쥐어뜯긴 채, 확신에 가까운 탈락의 예감을 안고 면접장을 나와 걸었다. 결과는 그날 바로 나왔다. 과연 21세기에 걸맞은 속도다.


그룹 면접에 함께 들어갔던 이와 길이 같아 5분 정도 같이 걸었다. 나보다 어린 동생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그룹 면접에서 완전히 개소리만 하다가 나왔다는 것, 알고 보니 서로 집이 5분 거리에 있고 다니는 도서관도 똑같다는 것, 예술 분야는 제대로 된 일자리가 너무 없다는 것, 고향이 기차역 한 칸 차이라는 것, 집값이 비싸서 다음 이사가 고민이라는 것.


처음 보는 사람이랑 오만 때만 이야기를 다 했네.


아무 기약도 하지 않았고 연락처를 교환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애가 잘 됐으면 좋겠다.  


2.

아침에 일어나 살기 싫다,고 생각한다면 우울증이라 하던데. 그러나 나는 우울증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사교적이고 심상하다. 좋든 싫든 실컷 다 살아 놓고 살기 싫다, 말하는 밤보다는 아침에 시체의 자세로 누워 말하는 살기 싫다, 그것이 죽음에 대해 조금 더 진정성 있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3.

새가 노래하고 햇살이 소복소복 쌓이는 초록숲에 앉아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도 그렇다. 삶에도 밤이 있듯, 죽음에도 낮이 있는 것. 새야, 돌아, 나무야, 내가 여기에 있어.


4.

미국 시인 빈센트 밀레이는 <죽음의 엘레지>에서 네가 죽어도 장미와 진달래는 피어 있을 것이고 흰 라일락으로부터 햇빛 밝은 소리가 들릴 것이며, '너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아름다움은 별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별로 사라질 것이 없다.


5.

친한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친구 중에 죽은 애가 있는데"로 시작되는 말이 있었다. "후배 중에 죽은 애가 있는데"로 시작되는 말도 생각했다.


6.

나의 생인(因): 살고 있지 않음.


7.

죽음에서 삶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은 너무도 대단한 일인데, 그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상장은 커녕 눈앞에 산재한 것은 급한 인생 과제와 밀린 세금뿐이라, 게다가 조금이라도 내리리라던 폭탄 금리 오르. 참나, 삶이라는 이 미친 사기꾼이, 나 또 낙동강 오리알.

 

8.

늦은 밤, 한 선배가 걸음 속도를 늦추며 제 갈 곳을 진즉 넘어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바뀌기 전까지 기다려 주었는데 그 몇십 초가 그렇게 따스했다.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내 앞에 있던 횡단보도가 삼도천이라도 되는 듯이, 나는 뒤로 뒤로 걸으며 웃으며 두 손을 힘껏 흔들었다. 따뜻해지면 또 보자, 그래요, 또 봐요…… 그럴 수 있다면. 기약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보이지 않아서. 겨울에 잘 어울리는 풍경이라 생각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9.

최근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 50대 선배는 내가 좋은 소식 있으면 꼭 연락한다고 해놓고서 일 년동안 연락이 없어서 기다렸다고 했다. 먼저 사회에 정착한 선배로서 자꾸 미안하다고 했다. 20대의 1년은 30대의 2년이고 40대의 3년이니, 너무 늘어지지 말고 뭐든 빨리 결정하라는 조언도 해 주셨다. 40대 선배는 마음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서울인데, 더 자주 보자 했다. 이상한 사람 많은 세상이니, 조금만 이상해도 미리미리 피하고 몸조심하며 살아라 했다. 30대 선배는 내가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그냥 바보야 하고 놀리면서 평소처럼 놀 거라 했다. (나도 30대인데, 다들 대학 시절 선배들이라 여전히 날 스무 살 취급한다.)


여기저기서 택시비를 중복으로 받아서 돈이 남아, 그걸로 김밥을 한 줄씩 한 줄씩 야금야금 사 먹고 있다. 김밥 한 줄이 뭐가 이렇게 비싸지. 아무튼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10.

삶의 밑바닥에서 종일 밝고 맑고 찬란하다면, 그게 진짜 미치광이 아닌가.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말했다. "미친 사람과 나의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죽은 사람의 못다 한 이야기와 죽다 만 사람의 말 못 한 이야기는 한 끗 차이인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죽음의 엘레지를 노래하는 자에게 죽음은 다. 나는 아직도 미치지 못했다.


11.

시가 취미나 취향을 넘어선 지가 오래되어서, 어떤 시든 거기서 손잡이나 난간 같은 걸 찾아내어 하루치 삶을 매달아 건다. 그날그날 삶을 구걸하듯이 시를 읽는다.


'한 권의 책은 지연된 자살이다.' 이건 루마니아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아포리즘.


12.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쓰곤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고백은 위선이자 회피이자 비겁이자 사기였다. 아주 작은 희망도 시난고난 높은 값을 쳐주는 것이 겨울인지라, 나는 여기서 사자인 척 호랑이인 척 헐벗은 희망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면서, 희망난의 시대라고 편파 선도하면서, 그냥 우리 다 같이 가난한 겨울 왕국에서 살자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물귀신 작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참나. 이제 내가 나한테 사기를 치네.


그러나 겨울이 여름보다 덜 싫다, 까지는 위선이 아니다. 죽고 싶다,까진 아니어도 살기 싫다,는 진짜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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