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도 지쳤다. 절망하는 데도 체력과 인내심이 필요한 것을. 어느 날 설거지를 마치고 책상에 앉았을 때, 이유도 없이 모든 것에 기적처럼 너그러워진 순간이 있었다. 오랜 절망에게조차. 그건 이해도 아니고 수긍도 아니었으며 체념도 아니었는데, 말하자면 '안녕, 잘 자'라고 말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증오. 사랑. 증오.
미천한 집착과 집요한 분심은 나를 이 땅에 붙들어놓는 중력과도 같은 힘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내 존재는 허무의 바다로 싸락싸락 터져나갔을 것이다. 나는 영악하게도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의 부속물을 알뜰살뜰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저열함과 비정함을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게 남은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그 시절 나를 유지하고 보존했던 유일한 방법이, 그러나 이 삿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나의 염세는 어디로 향해 있었던 것인가. 나의 질문은 어디로 향해 있었던 것인가.
죽음. 삶. 죽음.
희망과 등가적인 절망을, 사랑과 등가적인 증오를, 삶과 등가적인 죽음을, 우리는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삶 속에서 죽음을 묻는 것은 국으로 삶으로 귀결될 뿐. 증오는 사랑 고백이나 마찬가지이며, 의미 없음의 의미 없음도 의미 있음인 것을.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붙인 것은 끝도 없이 곤고한 현실이었을 텐데, 그걸 선택의 문제였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차라리 묵언하자. 비안개가 눈앞을 가리고 신발에 자꾸만 검은 진흙이 묻어나는 이런 날에는.
문득 네이버에서 오늘의 운세를 쳐 보았다.
'상사는 당신을 구박하고 친한 몇몇 동료들 외에는 회사의 동료들이라 해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세요.'
포기. 노력. 포기…… 지금 실업자라서 다행인가. 거기서부터 절망. 희망. 절망, 이라는 문장이 시작되었다.
학자금 대출 이자 지원 신청 안내장이 날아왔다. 나는 졸업 후 5년 이상이 지났기에 대상이 아니었다.
전세 계약 기간의 1년이 지나면 저금리로 대환 대출이 가능하다고 해서 기다렸다. 1년째 되는 날 아침 일찍 가장 먼저 달려 갔더니 고금리로 연체자가 늘어나 그달부터 새로운 대출이 막혔다 했다.
전세 대출 갈아타기 서비스가 출시되었다. 나는 계약 기간의 절반 이상을 살아서 대상이 아니었다.
청년 지원 정책이 뜬다. 나는 만 34세를 막 넘겨서 대부분 해당되지 않는다.
신혼부부 지원 정책이 생겨난다. 나는 미혼이라 해당되지 않는다.
주민센터마다 전세사기 피해고충센터가 생겼다. 내가 사기를 당했을 때는 몇 번을 신고해도 모른 척하던 그들.
우리 세대는 국민 연금을 못 받거나 아주 적게 받게 될 거라 한다. 마지막으로 위태위태 윗세대를 부양하다가 노인이 되어 돈 없고 자식 없는 사람들은 사회적 고려장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단다. 인구 문제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확정된 불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