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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May 16. 2024

오늘의 나를 다 쓰고 잘래요

#11

부처님 오신 날, 휴일에 많은 일정을 몰아넣었다가 결국 모두 미루거나 취소했다. 절에 가려던 것도. 같이 가겠다던 친구도.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일도. 영상 아르바이트도.


비가 내렸다. 비가 하늘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오늘은 비 오신 날이었고, 비 냄새 눅신한   나의 절이었고, 도처에 잠재태처럼 멈춰 있던 빗방울들, 시간들, 풀잎들이 하나하나 다 생것의 불상이었다.


오월답지 않게 질펀한 바람 속에서 나는 촉각을 잃은 채 승냥이처럼 걸어 다녔다. 지잉. 지잉. 액정이 다 깨진 폰이 가방 속에서 불안정한 진동음을 울려댔지만 강풍 속에서 차마 그것을 열어볼 수 없었고,


[안전 안내 문자] 강풍주의보 발표, 외출을 가급적 자제해 주시기 바라며, 간판 부착물 등 시설물 피해 없도록 주의 바랍니다.


를 읽은 것은 나중이었고 나는 그 시각 수선화를, 양귀비를, 마침내 작약을…… 그 두꺼운 것을…… 탐스럽게 베어 먹었다. 달아. 이제 내 안에는 작약이 살아.


쓰고 싶은 것이 시인지 일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계속해서 쓰고는 싶어서 나는 수렵 채취의 단계에서 작약을 한 입, 양귀비를 한 입, 수선화를 한 입…… 일차적으로다가 삼켜보면서. 꿀꺽. 그러자 며칠 동안 썼다 지웠던 글이 남의 글처럼 멀어지고, 알 수 없는 괴기한 문장들이 스스로 팔랑팔랑 쓰여진다. 누군가 내 영혼을 바꿔치기한 것 같아. 나는 이상 나글에 참여할 없다. 나는 내 글의 원작자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니 그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 그는 투고를 할 것도 아니면서 시를 신처럼 받들면서  같은 건 믿는다면서 앞길이 가로막혔다면서 꽃 속에 독이 든 게 틀림없다면서 편지를 쓰고 싶다면서 떼를 쓰다가, 떼를 쓰다가, 이번엔 스스로 폐기되고 말겠다면서 우당탕. 그러고는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모든 게 다 스쳐 지나갔다고 정성스럽게 공염불을.


가까스로 우산을 부여잡고 숲보다 더 어둡고 음산한 집으로 돌아오니 두 손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다. 불안정한 진동음처럼. 아니었다. 쥐가 난 게 아니었다. 그저 해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주 천천히 녹아가면서 시장에서 사 온 호박죽을 한 숟갈, 또 한 숟갈, 헉, 맛있잖아. 달아…… 이 미음 같은 것을 떠먹기 위해 나는 그토록 허약하게 죽고 싶었던가. 알약을 먹어도 미음을 먹어도 한결같이 이물감과 구역감을 느끼면서 나는,


늦은 밤 노트를 펼치고 있네요 오늘의 분열을 다 쓰고 잘래요 <쓰기>도 쓰고 <쓰지 않기>도 쓰고 <쓰지 않기를 쓰기>도 무제한적으로다가

.

.

.


쓸래요, 이것이 작약의 이야기라고 믿으면서


내가 나 되기를 포기했다는 듯이

.

.

.


오늘은 이곳이 나의 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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