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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un 04. 2024

편지. 발신인 불명.

#12

토요일 저녁이었다. 해거름까지 소설책 한 권을 다 읽었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하루가 통으로  날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끊지 않고 읽고 싶었는지 몰라. 아파. 먹어도 아프고 먹지 않아도 아파. 목에 구멍이 난 것 같아. 나 어서 다른 것을 먹고 싶어…… 겨울 끝물의 동백꽃, 아삭아삭한 여름 수국, 달빛에 비해 너무 잔인한 햇살, 그런 것들을.


책을 덮고 바깥으로 나갔다. 골목 어귀에서 햇빛의 잔당들이 장미를 쓰러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제까진 오월의 장미였으나 오늘부터는 유월의 장미라 불리게 된 그것들, 의 행복하고 고통스러운 얼굴들. 나는 가볍고 투명한 렌즈가 된 것처럼 꽃들의, 사실은 바람의, 실루엣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마침내 뚜렷한 몰이해 속에서 시선을 옮겼다. 찰칵. 그러자 거대한 산자락이 내 눈동자로 흘러들어왔다네…… 유월의 장미를 쓰러뜨린 섬약햇빛이…… 아아, 따사로와, 실명할 것 같아, 누가 나를, 보고 있어요?


걷고 있는가, 쓰고 있는가.


알 수도 없고 알아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파도의 숨결처럼 거칠게 일어난다. 사막과도 같은 아스팔트 길을 끝없이 걸으며 너는 지금 자연의 언어를 쓰고 있니? 무엇으로? 무용한 호기심과 나약한 절제력과 세상에 대해 지치지 않는 나의 악의로…… 공황 상태에 빠진 채 그녀는 어디로 걸어가는가. 책으로부터 해방되고자 책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하는 즉시, 그녀는 쓰기 시작한다. 다음 문장 뒤에 다음 문장. 다음 걸음 뒤에 다음 걸음. 썰물과 동시에 밀려오는 밀물의 환각 속에서 도착한  나라는……


여름이다.


검은 새가 태양을 집어삼키는 나의 정원에서, 나는 비로소 종알거림을 멈춘다. 시끄러운 겨울, 입장. 절정의 침묵, 입장. 하늘을 보시오. 오늘의 구름은 어떤 색깔입니까. 여름이 지나고 나면 구름이 하얗다고 믿었던 날들의 순결한 어리석음을 알게 된다. 저녁에는 구름이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지붕지붕 유순하게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나면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순간이 온다. 빛은 없었다. 거먹구름이었다. 나는 검붉은 양귀비 꽃잎 속으로 들어가 수천 개의 태양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읽기도 쓰기도, 드디어, 기쁘게 포기한다. 여기에 시는 없나니. 미안해요, 제가 너무 말이 없었지요…… 나는 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목이 아파요…… 스르르 주저앉아 태양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작약, 수선화, 수레국화…… your highness. 꽃을 촬영할 땐 바로 이 각도에서. 감히 그것들을 위에서 내려다보지 마라. 여기에 신은 없나. 신이여, 당신은 휴식하소서.


오월과 함께 작약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절정을 제외한 모든 장면들이 내 안에서 기이한 열정을 자아낸다. 어디 갔니. 어디로 갔니…… 나는 절망한다. 여름이, 작약을 죽였어. 나의 기도 또한 서두름 없이 서서히 시들어가리라. 여름은 나뭇잎을 무성하게 하여 호수에 잠든 신의 얼굴을 가린다지. 믿지 마라. 구름은 하얀색이 아니란다. 그런데 어떤 마른 여자가 그걸 믿었대. 어쩐다니.


그때 개 한 마리와 사람 한 명이 무엇에도 곁을 주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때 노년의 부부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나를 관통해 갔다. 그때 나는 내 오래된 카메라를 다독거렸다. 우리 언젠가 멋진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우리의 숲은 무한해. 언제나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검은 새. 카메라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검은 새가 태양을 울컥울컥 토해냈다. 숲이 부지불식간에 추워졌다. 여름, 퇴장. 조금만 기다려요. 이제 거의 끝났어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 나를, 쓰고 있었어요?


오늘 이 글을 쓴 것은 누구일까. 오늘의 문체는 어느 나라에서 온 신인가. 숲에서 버려진 편지를 줍는다. 천국에서 떨어진. 발신인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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