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67
봄바람이 위장까지 파삭파삭 스며들던 어느 저녁, 갑자기 세상 잡사 모든 기억이 옛날처럼 느껴졌다. 맞아, 내가 그런 일을 당했었지, 나, 소리도 없이 울면서 종일 시방 천지를 걸어 다녔었지…… 절망 너머 다시 새로운, 잡초 같은 절망과 싸우며…… 한 세상 잊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그러나 이제는 가끔씩만 옛날의 절망을 생각한다. 저녁에는 다만 집으로 돌아가기.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술로든 글로든 미쳐야겠다는 분망한 마음 없이. 가만사뿐. 그 즈음부터 왠지 술과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맹목적이고 고독한 음주!)
작년 봄, 이대로 삶으로부터 완전히 내동댕이 쳐지는 건가 싶을 때쯤 아슬하게 조그만 계약직 자리를 하나 얻게 되었다. 2년이라는 새로운 연명 장치를 달고서,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유독 사회성 떨어지는 어색한 천성 때문에 오직 근기만 가지고서 (언제나처럼) 미련스럽게 회사 생활에 적응해야 했고, 전세 사기 경력으로 문제가 많았던 여름날의 이사도 결국 어떻게든 해냈다. 알바 사기 건은 신고하고도 정당한 몫을 받지 못했지만, 또 다른 주말 알바를 병행하면서 차근차근 돈을 모아 주변에 빚을 갚았고, 13년 만에 감격스럽게도 학자금을 청산했다. 가을과 겨울에는 심리 상담을 다니며 살아오면서 그때그때 다음 절망으로 넘어가느라 피난 가듯 버렸던 수많은 과거의 나들을 다시 만났다. 그 나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심정이 되고 말지만…… 그래도 조금은 애틋함 같은 것이 생겼달까…… 여행은 한 번도 가지 못했지만 한 해에 유독 2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요즘은 주말 알바도 그만두고, 읽기도 쓰기도 꽤나 부진하다. 대신 아무리 피곤해도 조금 일찍 출근해서 무엇이든 소량 읽는 루틴만 유지하고 있다. 저녁과 주말에는 숲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꽃과 새와 나무의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듣고, 자연의 방식으로 삶을 이해하고, 언젠가 세상을 향해 아름다운 편지를 쓰고 싶다는 작은 소망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몇 달 동안은 평소보다 술을 더 자주 찾았던 것을 보면, 나는 아직은 술이라는 친구가 주는 맹목적인 우정에 기대고 싶었나 보다. 따스한 취기가 은근히 올라와 세상이 두 개로 세 개로 흔들리면, 거기 어딘가에 나를 위로해 주는 세상 하나쯤 있다는 듯…… 나는 무엇을 찾아 밤마다 거듭거듭 헤매었던가.
저녁에는 다만 집으로 돌아오기. 집에 돌아와 술 대신 향기로운 꽃차를, 책(에 대한 집착) 없는 저녁을, 자기 전 스트레칭을, 가끔은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위로를 나에게 선물해 주면서 알코올 없이도 황홀한 복시의 세계에 마음껏 취해보라는 듯이 나 자신과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다. 나야, 네가 찾던 내가 여기에 있어. 수많은 나들과 함께 짧은 봄밤을 우왕좌왕 걷다 보면 내가 알코올에 가장 중독되어 있던 시기에도 나는 언제나 나 자신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록 그때는 찾지 못했지만,
다 찾지 못하더라도, 아니, 하나도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여기까지.
다 읽지 못했고 다 쓰지 못했더라도, 여기까지. 거기서부터는 두고 가는 연습. 다만 집으로 돌아가기. 마지막이 언제든, 무엇의 마지막이든, 어차피 거기까지만 할 수 있는 거라서. 언젠가 그날에도 여기까지, 하고 딱 그만할 수 있다면 좋을 테니까.
봄날 저녁, 얼굴에 그늑히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가 일품이다. 절망은 한순간 가뭇없어라…… 오늘도 무사히 내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