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57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운 좋게 빈자리에 앉아 창밖을 오뚝 바라보는 순간, 문득 흘러가는 삶의 정동이 짜르르 밀려오며 눈물이 핑글 돌았다. 오월의 선물 같은 긴 연휴에도 쉼 없이 일했다. 생존에 대한 두렴으로 들어오는 알바는 닥치는 대로 수락했기 때문이다. 평일과 휴일이 따로 있지 않다. 본업과 부업의 구분도 따로 있지 않다. 지난 새벽까지 노동을 위해 혹사된 나의 눈알과 손목, 미간과 허리여, 오늘은 쉬거라. 그러한 자체의 허락으로 나는 지하철의 빈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한순간 움직이는 주변의 모든 것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움직인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는 건 움직인다는 것. 살아 있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는 것. 미량의 상쾌한 기분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것이 지난날의 슬픔과도 같이 내 존재를 흠뻑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상쾌한 슬픔일까, 슬픈 상쾌함일까.
을지로3가에 내려 세운상가를 향해 걸었다. 익숙한 고독 속에서도 오늘만큼은 조금 이상했다. 나 같은 존재마저도 순순히 대도시에 편입된 것 같은, 그럴 리가 없는 느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리 되어버린 느낌. 한 외국인이 나에게 을지로4가로 가는 길을 물었다. 고 스트레이트, 예스 예스, 파이브 미닛. 그는 불안했는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했고, 같은 대답을 세 번이나 들은 뒤에야 땡큐, 하고 표정을 풀며 웃었다. 그가 드디어 자기 자신의 웃는 표정을 공개했을 때, 느닷없이 내 존재의 긴장이 풀렸다. 나 또한 대도시를 향해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고 싶었던가? 혹은 같은 대답을 여러 번 듣고 싶었던가.
"그럼요, 걱정 마세요, 을지로3가 다음에는 틀림없이 을지로4가가 나온답니다."
작은 책방에 들러 괜히 고백록 몇 권을 들춰 보았다. 나는 고백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뻔하게도 고백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 테지. 문득 책방에서 일하는 동안 내 책도 아니면서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대출 불가를 선언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뻔뻔했던 지난날들을 반성하며 몽테뉴의 책을 한 권 구매했다. 혹시 여기 어딘가에도 대출 불가한 마음이 있을까 봐. 그 마음, 나 이해합니다. 이로써 내 자취방은 또 한 권의 책만큼 무거워지겠지. 이 책은 가능하면 깨끗이 보도록 하자. 깨끗한 책은 가난한 날들에 구황 음식이 되어줄 것이므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느릅나무 껍질과 씨앗을 떠올리며 카페로 걸어갔다. 느릅나무 껍질은 가난한 자들에게 훌륭한 음식이 되어주었다지…… 느릅나무 씨앗은 구원의 날개를 펼치고 꽃잎처럼 하늘하늘 떨어진다지…… 운 좋게 카페에도 빈자리가 있었다. 마치 내가 구원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듯이. 앉을자리가 있다는 것. 앉아도 된다는 것. 나는 의자 위에 놓여 있는 막대한 혜택에게 땡큐, 하고 우아하게 말하고 싶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바람이 낭창낭창 불었다. 거기에 우두망찰 앉아 있었다. 새 책은 새 책으로 두고, 앉아 있기. 앉아 있을 때는 그저 앉아 있기. 마침맞게 어떤 문장이 하나 떠오른다.
'걱정 말우. 봄부터는 운수 풀리겠수.' (*반칠환 詩, <호수의 손금> 中)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반칠환 시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로 어렴풋이 시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연이 끝난 후에는 <웃음의 힘>이라는 개나리색 표지의 시집도 구매하고 사인도 받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시집을 펼쳐보지 않았다. 시인은 나무와 들풀의 이름을 외우는데 푹 빠져서, 어느 순간 자신이 시를 쓰려고 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고 했다. 역시 시인들은 천하의 거짓말쟁이다! 이렇게나 많은 시를 팔고 있으면서! 게다가 오늘 카페에서 바람과 함께 기억 속에서 나근나근 불어온 그 시는, 내가 새 시집을 펼쳐기도 전에 이미 읽혔던 것이렷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시를 쓰려고 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뻔뻔스럽게 기억해야겠지.
출근하는 것이 나에게는 휴가인지라, 휴일이면 휴일일수록 정신없이 바쁘다. 그러나 오늘 하루만큼은 본래면목 청정백수의 세계로 함빡 빠져들고 싶었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현실 세계의 자디잔 의무와 분란한 시름을 내팽개쳐놓고 고독한 도시 여자가 되어 걷고, 마시고, 걸었다.
그리고 방향 없이 걷던 중에 이정표를 발견한다. 사물의 언어에 귀 기울이던 백수의 본분에 충실하며, 낡고 헐한 '추락 위험' 표지판 앞에서 한없이 추락했던 지난날들을 곰곰 회상해 본다. 마치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듯. 백 년 전쯤 그런 일이 있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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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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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서 끼적이고 있노라니 이제 막 몽상이 시작되려는 건지, 갑자기 몽상이 아주나 끝나버린 건지 모르겠다. 이것은 고독한 몽상일까, 몽상의 고독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