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500일

근황

D-100

by 세라

새해인데 뭐 했어요?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생일이나 새해 같은 날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안녕하세요' 대신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날. 새해는 '안녕하세요' 대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는 날. 그저 사람들의 인사말이 달라지는 날일 뿐이다. 내게 의미 있는 축제일은 좀 다르다. 가령 내 첫 카메라의 생일. 나의 검은 새. 그날은 2월 18일이고 나는 그날 퇴근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네 빵집에서 작은 보틀 케이크를 사 올 예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인간의 방식으로 그의 노고를 기리고, 진실한 우정에 감사하며,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축하할 것이다. 나와 나의 검은 새, 우리에게는 조금 특별한 날이 되겠지.





자유와 방종의 신분이 되기까지 D-100. 퇴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팀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고 사무실 이사도 해야 했다. 이놈의 역마살은 잠시나마 정착한 곳에서도 열렬하게 작동하고 있다. 적토마의 해, 말처럼 힘차게 달려보자고? 아…… 식상해라…… 그와중에도 나는 계속 울었다. 탱탱 부은 얼굴로 출근해서는 또 금세 고장이 나서 그렁그렁해지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너 왜 그렇게 우니? 어차피 100일 후에 다 헤어질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이 고작 100일 앞당겨졌을 뿐인데, 이별이 갑자기 최고난이도로 상승해 버렸다. 이사와 이직에 누구보다 이골이 났다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전혀 단련되지 않은 내 모습을 본다.




버스 파업 이틀간, 미끄러운 빙판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나는 애매하게 돌아가는 지하철 환승 대신 지상 빙판길을, 직선의 위험한 길을 선택했다. 그게 환승 통로를 걷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는 길이란 걸 생각해내지 못하고. 내가 눈길을 잘 헤쳐가면 될 줄 알았다. 바보 같이 힘들게. 그냥 좀 돌아가지. 나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효율적인 길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력을 다 쓰고 나서야 겨우, 남들은 처음부터 선택했던 그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길로 울컥울컥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어제는 큰 교통사고가 있었다. 평소 타고 다니는 버스, 평소 걸어 다니는 길 위에서, 버스 한 대가 통째로 박살 날 정도로 큰 사고가 일어났다. 중상을 입은 승객과 보행자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누워 있었고, 사람들은 수군대고 있었다. 죽었대, 저 사람 죽었대. 팔이 꿈틀거렸다. 살아있다, 살아있대. 건물 위에서는 이 모든 장면이 너무나 잘 보여서 가슴이 철렁철렁했다. 퇴근할 때까지도 비현실감과 현실감의 부조화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 내게 어떤 이는 너는 너무 여려, 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여려서 남들보다 더 아파하고, 더 무서워하는 걸까. 이럴 때는 모두들 좀 더 유난스러워도 되는 거 아닌가. 매일 유난스럽게 시비가 붙는 대도시의 출퇴근길 속에서 사람들은 이미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만 것인가. 메리크리스마스, 해피뉴이어, 하고 인사하는 유난스러움은 허용되면서, 왜 걱정과 슬픔에 대한 유난스러움은 유약한 성정으로 치부되고 마는 건지.




그날 오후 비상연락망이 가동되었다. 사람들은 괜찮냐는 연락을 받고, 괜찮냐고 안부를 건넸다. 그렇구나…… 나는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생일이나 새해 같은 날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재난 상황에서도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구나. 만약 이 지구에 느닷없이 혜성이 충돌한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그런 말들을 어디에다 던져두고 가야 할까. 늦은 밤 문득 유치한 생각이 인다. 있어도 사라지고 없어도 사라질 말들을, 나는 여기 가상의 공간에다 마치 유언처럼 쓰고 있는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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