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0
어떤 식물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 '춘화'라는 과정을 겪는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추위를 '반드시' 겪어야만 꽃눈을 틔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700시간의 추위가 필요한데 600시간만 추웠다면 절대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튤립, 당근, 브로콜리. 이들은 겨울의 온도와 시간을 기억하며, 자신이 겪어낸 추위를 잊지 않고 꽃을 피운다.
잊지 않고
꽃을
피운다.
입춘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영하 16도의 따가운 추위 속에서도 봄이 지척에 다가와 있음을 느꼈다. 어떤 하루는 춥고 어떤 하루는 덜 춥지만, 가장 혹독한 추위는 지나간 것이다. 오후 다섯 시의 햇살이 더 뭉근해졌다. 겨우내 한 자리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있기만 했기에, 빛의 명도와 채도, 밀도와 각도까지, 모든 것이 미세하게 바뀌었음을 나는 마치 식물처럼 감지할 수 있었다.
2월의 풀들은 온 잎 온 뿌리를 다해 마지막 고비를 견뎌내고 있었다. 복슬복슬한 털로 제 몸을 무장하고, 얼어죽지 않도록 설탕을 비축하며, 갸륵할 정도로 작은 잎들을 사방으로 펼쳐내어 땅을 한껏 끌어안은 채, 일광과 지열을 모으고 있는 풀꽃들. 수선화, 제비꽃, 물망초. 그들은 그저 살아 있고자 했다. 제게 주어진 겨울을 묵묵히 채우며, 성급하게 꽃 피우지 않으며, 오직 한결같은 일심(一心)으로 지극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 어떤 수행자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간결한 마음으로.
'살아-있음', 그 고문의 시간을 나는 언제나 의심했었다. 아니, 시간의 경과조차 믿지 못했다. 그러나 밤마다 찾아오는 슬픔은 왜 그토록 안락했던 것인지, 나는 매사 간결해지는 법을 몰랐고 햇볕 쐬기를 게을리했다. 그럼에도 2월은 내게 한 알의 꽃눈을 허락하여 부드러운 춘심을 불어넣나니—
그저 오후가 길어져서가 아니라, 길고 난망한 겨울을 견뎌내고…… 화엄 세한을 지나……
잊지 않고 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