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8일, 미국 동부 현지 시각 저녁 7시 30분경, 미국 연방대법관 루쓰 베이더 긴스버그가 사망했다. 향년 87세.
(사진 출처: giglebox/society6.com)
긴스버그(Ruth Bader Ginsburg)는 1993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임명을 받은 이래로, 27년을 연방대법관으로 일했다. 1980년에서 1993년까지는 워싱턴 DC 연방 항소법원 판사를 지냈다.
판사로서, 대법관으로서 긴스버그의 활약은 눈부시다. 그러나 설사 그가 카터와 클린턴의 선택을 받지 못해 법복을 입을 기회가 없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미국 법조계의 스타로 남았을 것이다. 법학자로서 또 변호사로서 그가 남긴 지대한 공헌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루쓰 베이더는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코넬 대학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마틴 긴스버그와 결혼했다. 루쓰 베이더가 루쓰 베이더 긴스버그가 된 것이다. 한 살 터울의 둘은 모두 유대계 미국인으로 동향이었다. 긴스버그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학업을 잠시 중단한다. 곧 첫 딸이 생겼고, 남편은 징병되어 2년 간 군 복무를 했다.
남편의 군 복무가 끝나고 부부는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 약 500여 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단 아홉 명이었다. 로스쿨 원장은 그 아홉 명의 학생들에게 그들이 "남자들의 자리를 뺐은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냐고 공공연하게 물었다. 긴스버그가 어떤 환경에서 공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개인적인 시련도 겹쳤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마틴이 고환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긴스버그는 남편이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간호에 힘썼을 뿐 아니라, 남편이 학업에 뒤처지지 않도록 도왔다. 아이를 키우고 (딸아이 제인은 로스쿨을 시작할 때 14개월이었다) 그 스스로 학업 역시 지속하면서 말이다. 동시에 그는 여성 최초로 하버드 법률 평론지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건강을 회복한 남편은 로스쿨을 곧 졸업하고 뉴욕의 한 로펌에서 세법 담당 변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일 년 아래의 긴스버그는 가족이 함께 지내기 위해서 1년 남은 로스쿨 학업을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마치기로 한다. 그는 1959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사진 출처: CNN)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 유수의 로스쿨의 우수 졸업생들은 보통 고등법원 판사들의 서기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연방대법관들의 서기가 되는 것이고, 연방 항소법원 판사들의 서기가 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다. 구직에 있어서 로스쿨 교수들의 추천서는 절대적이다. 앨버트 색스 하버드 로스쿨 교수가 연방대법관 팰릭스 프란크푸르터에게 긴스버그를 추천했다. 그러나 프란크푸르터는 여성 서기를 고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답하며 색스 교수에게 남자 졸업생 추천을 부탁했다.
사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우수한 학업 성적과 인턴으로 일할 때 드러난 빼어난 업무 능력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긴스버그는 컬럼비아 로스쿨 시절 은사 한 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는 오직 긴스버그만 추천했다고 한다) 간신히 연방법원 뉴욕 주 남부지원의 에드먼드 팔미에리 판사 서기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2년 간의 서기 일을 마치고, 긴스버그는 몇몇 로펌에서 일자리 제의를 받았다. 모두 남자 동료들에 비해서 턱 없이 낮은 보수를 받는 조건이었다. 로펌에서 일하는 대신, 긴스버그는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스웨덴으로 건너가서 민사소송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뉴저지 주립대학(Rutgers) 로스쿨의 교수가 되었고, 9년 뒤에는 모교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여성 최초로 종신 교수가 되었다.
그 후로 긴스버그는 대학 내의 성차별에 맞서는 한편, 미국 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과 긴밀히 공조하여 미국 사회의 성차별을 혁파하는 데 앞장선다. ACLU의 "여성 인권 프로젝트"가 이룬 수많은 성과들은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성과 여성을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법률이 많았다. 한 예로 아이다호의 법에 따르면, 자식이 사망한 경우 아버지가 자동으로 유언집행자가 된다. 이 법의 헌법적 타당성이 문제가 된 것이 유명한 리드 대 리드(Reed v. Reed [1971]) 사건이다. 긴스버그는 ACLU의 이름으로 연방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여, 아이다호 법이 위헌임을 역설한다. 1971년 연방대법원은 이 사건을 다루면서 사상 최초로 법률의 성차별성을 위헌으로 선포한다.
긴스버그는 그 의견서 변호사 명단에 선배 여성 법률가 도로씨 케년(1888-1972)과 폴리 머레이(1910-1985)의 이름을 함께 기입한다. 그들은 물론 해당 사건을 준비하는데 직접적인 역할은 없었지만, 연방대법원 최초의 '성평등' 사건을 준비하며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들의 투쟁과 연대를 기록하고 경의를 표한 것이다. (머레이는 긴스버그가 로스쿨 학생 시절 여름 인턴을 했던 로펌(Paul, Weiss, Rifkind, Wharton & Garrison)에서 마주쳤던 변호사 중 한 명이기도 했고, 그의 법리 해석은 긴스버그가 성차별적 법률의 위헌성을 주장할 때 큰 영향을 주었다.)
(사진 출처: New York Times)
1970년 대에는 법에 의한 여성 차별이 아직 일상적인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차별이 오히려 여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마저 유행이었다. 법이 여성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보호한다는 식의 정당화였다. 그러나 교육과 취업의 현장에서 여성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 신용 카드를 만들고 대출을 받고 세 들어 살 집을 얻을 때 겪어야 하는 불이익, 군대나 감옥에서 겪어야 하는 차별 등을 여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할 수는 없었다.
1972년 미 공군 대위 수전 스트럭은 임신을 이유로 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긴스버그는 공군과 국방부의 손을 들어준 제9순회 연방 항소법원의 판결 (Struck v. Secretary of Defense [1972])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연방대법원에 보낸 의견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 상업, 경제 영역에서 여성들의 온전한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률들은 종종 '보호적'이고 유익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같은 법률이 인종/민족 소수자들에게 적용된다면, 아마도 그것들은 교활하고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즉시 평가될 것이다. 여성들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그들을 올려놓았던 대좌(臺座; pedestal)는 자세히 살펴보면 보통 우리(cage)로 밝혀질 때가 대부분이었다.”
긴스버그는 성차별의 피해자가 여성만이 아니라는 점 역시 강조했다. 그가 교수와 변호사 신분으로 연방대법원에서 구술변론에 처음 참여했던 프론티에로 대 리차드슨 (Frontiero v. Richardson [1973]) 사건은 여자 군인의 남자 배우자가 남자 군인의 여자 배우자들에게 제공되는 여러 혜택을 받지 못하는 규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이는 여성 군인에 대한 차별이자 남성 배우자에 대한 차별, 곧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가 되는 조처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결국 남성들에게도 피해가 되는 것을 밝히는 것, 그래서 결국 성차별은 모두를 희생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보다 효과적으로 알리고 보다 큰 동조를 이끌어 내는 것, 그것이 긴스버그의 주요한 전략 중 하나였다.
ACLU와 함께 일하며 긴스버그는 총 34개 연방대법원 사건을 이끌었고, 여섯 사건에 직접 변론에 나서서 그중 다섯 번을 승소한다. 그의 동료들은 긴스버그의 성취 배경에 그가 치밀하게 계획한 긴 호흡의 소송 전략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것이 약자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는 긴스버그의 능력이었다.
앞서 말한 프론티에로 사건 구두 변론 때, 긴스버그는 자신의 주장의 끝을 19세기 여성 운동가 새라 그림키의 말로 장식했다.
"나는 내 성별을 이유로 특별한 호의를 요청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남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목을 누르는 발 좀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의 변론 후에 질문을 던진 대법관은 아무도 없었다.
판사가 된 후에, 특별히 대법관이 된 후에 긴스버그의 역할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미국 문화에서 긴스버그는 조금 지나치게 성인화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들 정도니까 말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반대 의견(dissenting opinion) 중에, 한 가지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지난 10년 간 가장 중요한 판결 중 하나인 쉘비 카운티 대 홀더(Shelby County v. Holder [2013])에서 긴스버그는 자신의 동료 대법관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이 사건은 1960년대 민권 운동의 성과로 1965년에 통과된 연방 투표권 법(The Voting Rights Act of 1965)의 몇몇 조항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대까지 흑백 분리 정책이 심했던 남부 지역에서는 법률을 교묘히 이용하여 흑인들의 투표권 행사를 억제하는 일들이 횡행했다. 연방 투표권 법은 이런 관행들을 근절하기 위해 여러 제재를 가했다. 투표권 행사 억제를 목적으로 여러 조치를 시행한 적 있는 지역에서 선거법을 개정할 경우, 그것을 연방 법무부로 하여금 사전에 검토케 하고 문제가 없는 경우에만 허가하도록 한 규정이 대표적이었다. 이 규정은 원래 5년 시한으로 통과되었지만, 그 이후 계속 갱신되어 왔다.
연방 투표권 법의 해당 조항을 반대하고 나선 앨라배마 주 쉘비 카운티도 역사적으로 그러한 지역에 속했다. 이들의 주장은 쉽게 말해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더 이상 투표권 행사와 관련된 인종 차별이 없으니 연방 법무부에 의한 계속된 통제 역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방대법원까지 올라온 이 사건에서 다수의 대법관들은 쉘비 카운티의 주장에 동조했다. 1960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정당화되었던 주 정부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간섭이 현재의 맥락에서는 월권이라는 것이다.
긴스버그는 반대했다. 물론 연방 정부의 권한은 제한되어야 하겠지만, 문제가 된 카운티를 비롯한 여러 남부 지역에서 여전히 소수 인종에 대한 투표권 행사 억제 시도들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에서, 연방 정부는 주 정부에서 행해지는 권한 남용과 오용을 억제해야 할 헌법적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세상이 변하여 소수 인종에게 불리한 정책들이 별로 없으니 이제 연방 정부에게 선거법 개정 검토 권한을 준 그 법률 조항을 폐기하자는 동료들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차별적 요소가 있을 수 있는 선거 법] 개정들을 여태껏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저지할 사전 허가 제도를 내다 버리는 것은 마치 폭우 아래서 우산을 쓰고 가다가 몸이 젖지 않았다며 우산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