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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책과 계략, 혹은 진짜 정치의 시작

연방대법원과 미국 정치(3) #election2020

by 발태모의 포랍도

긴스버그 대법관 사망으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중 세 번째로 새로운 연방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트럼프와 공화당 지지자들은 벌써부터 쾌재를 부르고, 민주당 지지자들과 진보 성향의 시민들 주변은 가히 초상집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선 글에서 지적한 대로, 30년 만에 전임자와 전혀 다른 정치적 성향의 대법관이 임명되는 "극적인 교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은 연방대법관들의 정치이념 분포도다. 긴스버그 대법관은 소토마이어 대법관과 함께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띠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빈자리를 정반대 성향의 대법관이 채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가뜩이나 이미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이 숫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또 한 명의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들어선다면 이제 정치적 이해와 이념적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중차대한 사건들에서 진보 의견이 무참히 묵살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한 일이 아닌가? 작금의 상황에서 미국의 범진보 세력이 절망하는 까닭이다.

(연방대법관 이념 성향 분포도 | 그림 출처: Axios)


헌데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새 대법관 지명을 주저할 가능성은 없을까? 많은 미국인들은 4년 전 공화당의 행태를 떠올리며, 선거를 한 달 반 앞둔 지금 시점에서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4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때는 2016년 3월,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63세의 워싱턴 D.C. 연방 항소법원 판사 메릭 갈랜드를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했다. 한 달 전 세상을 떠난 스칼리아 대법관의 자리를 대체하는 인사였다. 스칼리아는 공화당 소속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표적인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었고, 민주당 소속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갈랜드는 중도/온건 진보 성향의 판사였다.


메릭 갈랜드 판사(가운데)와 당시 대통령 버락 오바마(오른쪽), 부통령 조 바이든(왼쪽) | 사진 출처: The Atlantic


먼저 글에서 설명한 대로, 대법관의 임명은 상원의 승인("by and with the Advice and Consent of the Senate")이 필요하다. 당시 상원의 다수당은 하필 공화당, 공화당의 원내 대표는 노회한 정치인 미치 맥코넬이었다. 오바마의 지명 선언 직후, 맥코넬은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2016년이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해이니만큼, 그리고 양당 후보가 계속 접전을 벌이고 있는 만큼, 레임덕 정권이 아니라 선거의 결과로 새로 들어서게 될 차기 정권이 새로운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며, 상원은 갈랜드 지명자를 위한 승인 절차에 돌입할 계획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하여 공화당은 선거 때까지 시간 끌기에 돌입했고, 민주당은 항의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내심 자신들의 대선 승리를 확신했으므로, 대법관 임명은 다음 민주당 대통령이 완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2016년 대선의 결과는 예상을 깨고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듬해 상원의 승인을 받아 새로운 대법관 닐 고써치를 임명했다.


2016년 갈랜드 지명 파동은 대선이 약 8개월 남은 시점이었다. 지금은 약 40여 일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맥코넬과 공화당이 내세운 기준을 놓고 판단해 보자면, 긴스버그 대법관 사망으로 생긴 공석을 선거 전에 채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과 맥코넬 상원 원내 대표도 그렇게 생각할까? 트럼프는 이미 새로운 대법관 지명을 강행할 의사를 천명했고, 맥코넬도 대통령의 지명이 있으면, 곧바로 청문회를 열고 절차에 따라 승인 찬반 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많은 민주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맥코넬과 공화당이 보이는 이와 같은 위선과 뻔뻔함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상원 원내대표 맥코넬의 말 | 사진 출처: 하원 의원 수전 델베이니 트위터 @RepDelBene


여기서 우리는 2016년 공화당의 노골적인 대법관 임명절차 방해와 2020년 현재 공화당의 임명절차 강행의 헌법적, 역사적 근거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2016년에 맥코넬이 이끈 임명절차 방해 정치는 간교한 술책처럼 보이는데, 이와 같은 일이 미국 역사 상 전례 없는 일이었을까?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상원은 헌법에 의해 대법관 임명에 관하여 "조언과 승인"을 할 의무가 있지만, 언제, 어떤 절차에 따라서, 얼마나 빨리 "조언과 승인"의 의무를 완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은 헌법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청문회조차도 1916년에 이르러서야 시작된 비교적 짧은 전통의 제도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라고 해서 승인을 빨리 해야 할 의무도, 미뤄야 할 의무도 없다. 대통령의 지명이 끝나면, 표결에 이르기까지의 다음 모든 절차는 전적으로 상원의 몫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789년이래로 현재까지 총 163명의 대법관 지명자가 있었고, 그중 37명(여러 번 지명받은 사람을 포함)이 상원의 반대로 도중에 지명 철회되거나 낙마했다. 그중 9명은 차후에 대법관으로 재지명되었고, 6명은 최종 임명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연방대법관을 지명한 전직 대통령은 지금까지 총 17명, 횟수로는 총 27번이다. 그중 11번은 실패로 끝났다.


대법관 임명 문제로 가장 골머리를 앓은 사람은 아마도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일 것이다. 타일러는 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과 함께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었는데, 대통령 해리슨이 임기를 시작한 지 정확히 한 달 만에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하자 대통령 자리를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총 다섯 명의 대법관 후보를 아홉 번에 걸쳐서 지명했는데, 상원의 극심한 반대로 여덟 번 실패했다. 그중 일곱 번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844년에 이뤄졌다.


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 역시 고초를 겪었다. 존슨은 1866년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탠베리를 새 대법관으로 지명했는데 상원의 반대가 대단했다. 상원은 스탠베리 지명자에 대한 승인 절차에 착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법 개정을 통해 연방대법관의 숫자를 당시 10명에서 7명으로 감축했다. 스탠베리가 채워야 할 자리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이다.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왼쪽)과 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오른쪽) | 사진 출처: 미의회도서관


기존하는 제도와 법칙을 특정한 파당적 이익을 고무시키는 방향으로 해석하여 십분 이용하고, 스스로 세운 원칙과 기준도 필요하다면 손쉽게 폐기하는 것이 정치판의 공리라는 현실은 개탄할만하다. 남에게는 추상같은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정치인들을 계속 보는 것도 힘 빠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헌법과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보건대, 공화당의 2016년과 작금의 행보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만약 새 대법관 지명을 꺼린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계산 때문일 것이다. 마침 트럼프 캠페인은 고전을 면치 못하던 차였다. 갑자기 생긴 대법관 공석 때문에 대법관/대법원 이슈가 다가오는 선거의 최고 쟁점으로 떠올랐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지난 8월 24일 CBS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6년 트럼프를 선택한 9개의 접전 지역(애리조나, 노쓰 캐롤라이나, 미시간, 텍사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조지아, 플로리다, 위스콘신)의 유권자 중 15-25%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으며,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에게 표를 던지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별도로 2-8%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투표 자체를 꺼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전에 새로운 대법관 임명을 완료하여, 연방대법원을 보수 정치 이념의 요새로 만드는 일에 쐐기를 박는다면, 그것이 트럼프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위와 같은 "한 때" 지지자들의 투표 행태에 어떤 영향을 줄까? 분명한 것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이들의 지지를 최대로 끌어 오기 위해서는 새 대법관 임명을 선거 후로 미뤄서, 선거의 중요성을 한층 높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속히 새 보수 대법관 임명을 완료하는 것은 가뜩이나 멀어지고 있는 예전 지지자들에게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이유를 던져 주는 것과 같다. 때문에 여론 분석과 정세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이다.


접전지역 9개 주에서 조사한 트럼프 지지자 분포 | 사진 출처: CBS NEWS


다른 관건 하나는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응이다. 공화당이 선거를 목전에 둔 지금, 4년 전 스스로 천명했던 원칙을 뒤집으면서까지 대법관 임명을 강행한다면,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거기서 어떤 메시지를 읽게 될까? 힘의 정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쟁취하고 쟁취한 권력을 파당적 이익을 위해 최대한 사용한다는 힘의 정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지금 민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현 정세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여기는 유권자들의 절망을 분노와 열망으로 치환하여 앞으로 남은 캠페인 기간 동안 총력전을 기울이는 것이다. 조 바이든이 차기 대통령이 되고,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 지위까지 탈환한다면, 연방대법원의 구성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위에서 예로 든 앤드류 존슨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의회는 원한다면 연방대법관의 수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대법관의 수는 1869년 이후로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지만, 그 전에는 5명에서 10명 사이를 오갔다. 1930년대 중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개혁 정책을 재차 사법심사로 걸러 내는 연방대법원에 맞서서, 당시를 기준으로 70세 이상의 대법관의 수만큼 새로운 대법관을 따로 임명하는 증원 계획을 수립한 적이 있었다. 측근을 비롯한 많은 세력들의 거센 비판과 때마침 시작된 대법원의 우호적인 판결로 루스벨트의 증원 정책은 결국 무산됐지만, 대통령과 의회가 힘과 의지를 모으면 얼마든지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정책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사실 대법관의 수가 아니라 연방대법원의 권한과 권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다. 꽤 오랫동안 미국의 진보 세력은 연방대법원을 정치, 사회, 도덕 문제들의 최종 심판자로 여겨왔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의 사법화를 불러오고, 9명에 불과한 비선출 법관들에게 필요 이상의 권위를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법관들의 힘을 늘릴 것이 아니라 줄여야 하는 때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기조의 사법부 개혁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방대법원이 더 이상 진보 정치의 보루가 아님이 명확해진다면, 어쩌면 오랜 타성에서 벗어난 진짜 정치가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이상과 목표를 소수의 법관과 엘리트들에게 위임하여 실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을 때, 미국의 진보 세력이 새삼 주목할 정치의 장은 다름 아닌 다수의 정치, 즉 지지층의 저변을 넓히고 대중을 기반으로 한, 법원이 아닌 의회 안팎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민주 정치다.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에 꽤나 비판적이었던 16대 대통령 애브라함 링컨은 취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링컨 | 사진 출처: The Lincoln Collection


"헌법의 억제와 제약 하에서, 여론과 대중 정서의 유유한 변화에 따라 언제나 용이하게 변화하는 다수야말로 자유로운 인민의 유일한 참된 주권자이다. ... 전체 인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차대한 문제들에 관한 정부의 정책이 만약 연방대법원에 의해 변경이 불가능한 형태로 결정된다면, ... 그러한 결정들이 내려지는 순간, 인민은 스스로 통치자이길 그만두게 될 것이고, 그러한 점에서 실제적으로 자신들의 정부를 고등 재판소의 손에 위탁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아마도 새 대법관 지명을 그대로 강행하려 할 것이고, 민주당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저지하고자 할 것이다. 순전한 세력 싸움이다. 4명 이상의 공화당원이 이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다면, 새 대법관의 임명은 피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설사 선거 전에 임명이 완료되어 연방대법원의 보수화가 한층 심화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트럼프와 공화당의 명백한 승리로 곧바로 이어질 필연적 이유는 없다. 여전히 모든 것은 선거의 결과에 달렸다.



<연방대법원과 미국 정치 시리즈>

1편: 긴스버그 대법관을 추모하며

2편: 대법관 임명의 정치

3편: 술책과 계략? 혹은 진짜 정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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