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미 Mar 11. 2019

함께할 때 완성도가 높아지는 글이 있다

'나의 글'이 아닌 '우리의 글'을 창작하는 기쁨


후배가 고민이 있다며 찾아왔다. 책을 내고 싶은데 다른 이에게 글을 보여주거나 출판사에 보내 봐도 반응이 신통치 않다고 했다. 지금은 혼자 힘으로 기획부터 편집까지 도맡아 책을 만드는 독립출판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단다. 독립출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의견을 물었다. 자기 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니, 타인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그야말로 ‘독립적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독립출판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기존 출판사에서 정해놓은 과정이나 틀에 맞춘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나 역시, 기회가 된다면 독립출판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기존의 출판업계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독립출판을 선택하는 것에는 우려가 앞선다. 후배에게 단순히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고 비평받는 과정에 두려움이 생겨 독립출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목적과 의도를 되돌아보고 확신이 서면 독립출판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해나가 보자고 답했다.     


시중에 있는 독립출판물들을 떠올려 보면,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면서도 디자인이나 편집에서 완성도 높은 책들이 많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일인 다역을 해내며, 본인이 쓴 글에 끝까지 냉정한 잣대를 가지고 작업을 한 결과물이다. 혼자 글을 쓰고, 편집과 마케팅까지 도맡는 과정이 만만할 리 없다. 오히려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수없이 묻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자신도, 독자도 만족할 만한 책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해보면 독자들은 저자의 수고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책이 완성되기까지 기획 단계부터 참여한 편집자, 책 표지와 본문 작업을 함께 한 디자이너, 본문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책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뛰는 마케터, 책이 무사히 인쇄되길 돕는 제작팀같이 많은 이들의 재능과 노고가 담긴 합작품이 바로 책이다. 나는 만듦새가 좋은 책을 만나면, 제일 뒷장을 펼쳐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한 번씩 눈으로 읽어보곤 한다. 책에선 작가의 이름만 돋보이기 쉽지만 실은 여러 명의 전문가가 역량을 모았기에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비단 책 쓰기만 그렇겠는가. 나의 서재에는 보물처럼 모셔둔 상패들이 몇 개 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글을 써서 받은 칭찬과 격려의 징표들이다. 그중 가장 아끼는 상은 ‘한국방송대상’에서 받은 두 개의 상이다. ‘한국방송대상’이란 방송사에 상관없이 한 해 동안 지상파에서 방송된 모든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계의 대표적인 방송 시상제도이다. 보도, 교양, 예능 등 전 장르, 그리고 지역 방송사 프로그램들까지, 출품된 작품과 후보자들 중 심사를 거쳐 최종 수상작과 수상자를 정한다.     


10년 전, 운이 좋았던 나는 두 해 연속으로 ‘지역 다큐멘터리 작품상’을 받았다. 그 어떤 성과보다 이 상을 받았을 때 기뻤던 기억이 난다. 방송 준비를 하느라 시상식 현장에 가지 못했지만, PD가 팀을 대표해 상을 받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짧은 순간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시상식에서 받은 상금을 회식비로 모두 탕진했지만 함께 방송을 만든 스태프들과 기쁨을 나누고 앞으로 더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자며 결의를 다졌다.    


방송작가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대본 좋아요”라는 칭찬보다, “방송 재미있게 봤어요”라는 격려가 더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방송으로 나가기 전 작성한 대본은 아무리 공들여 써도 미완성 작일뿐이다. 내가 열과 성을 다해 글을 써도, 진행자가 더듬거리며 멘트를 하거나 PD의 현장 연출이나 편집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면 무결점의 원고도 소용없게 되어버린다.     


방송 글의 완성은 철저히 협업으로 이뤄진다.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기 위해 보통 수십 명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방송 창작 과정에 관여하는 종사자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제작진과 기술진 그리고 출연자 그룹이다. 제작진은 방송을 기획하고 연출하며 글을 쓰는 인력들로 한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기술진은 방송 제작에 활용되는 기기들을 다루는 사람들로, 카메라 감독이나 오디오 감독, 기술 감독, 무대 감독 등이 이에 포함되며, 여러 프로그램을 맡고 있어 스케줄에 따라 촬영이나 녹화 시에만 참여한다. 마지막 출연자는 프로그램을 이끄는 진행자부터 리포터, 패널 그리고 방청객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이나 방송인뿐만 아니라 일반 출연자 모두를 말한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방송작가가 쓴 한 장의 구성안이나 대본을 토대로 각자의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풀어놓는다. 방송 글쓰기는 한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도록 써야 하고, 다른 직무의 구성원도 제작진의 계획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도록 곳곳에 배려 넘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 의심이 생기면, 기술진에게 이렇게 써도 글이 영상이나 오디오로 구현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하고, 원고를 쓴 후에도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출연진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해야 한다. 방송 스태프들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다르지 않다. 다른 요소들이 받쳐주지 않는데 악보 격인 구성안이 빼어나다고, 화면 연출만 역동적이라고 해서 박수받는 작품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조선시대 생활상을 그럴듯하게 재연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을 의뢰했다. 컴퓨터 그래픽 전문 업체에게 미리 시나리오를 전달했는데, 장면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내가 보낸 원고에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연락이 왔다. 화면 효과를 일정한 속도로 입히기 위해 문장 길이가 비슷했으면 좋겠다는 요구였다. 각  장면마다 꼭 필요한 글을 썼다고 생각한 나는 문장을 더 줄이기도, 늘이기도 어렵다며 시나리오에 맞추어 컴퓨터 그래픽을 제작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당시에는 어리석게도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쓴 글을 수정하라고 하니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작가실에서 우연히 이 통화를 듣고 있던 선배 작가는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자 글을 쓰고 싶으면 차라리 문학 작가가 되도록 해.”라고 호통을 쳤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선배는 이어서 말했다. “영상으로 재연하기 어려운 글이란 소리를 들으면 백 번이라도 고쳐 써야지. 넌 몇 년 차인데 아직 기본자세도 안 되어 있니.”라고.


원고를 수정하는 일에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고, 방송을 같이 만드는 이들이 왜 이렇게 찍고 편집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고, 설득당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라는 충고도 했다. 같이 방송을 만드는 동료들은 힘을 겨루거나 이겨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모든 과정을 공유하고 협력해서, 끝내는 그 결과에 대해 함께 책임져야 하는 공동운명체라고 강조했다.     


선배의 따끔한 가르침이 있은 후, 나는 달라졌다. ‘나의 원고’, ‘나의 방송’이 아니라 ‘우리 팀이 읽을 원고’, ‘모두가 함께 공들여 만드는 방송’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태도를 바꾼 후 받은 것이 한국방송대상의 작품상이었다. 깨달음 후에 얻은 결과라 이 상들이 주는 의미와 감동은 오래갔다.     


나 홀로 쓰고 서랍 속에 간직하는 일기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혼자 힘으로 완결할 수 있는 글은 없을지도 모른다. 혼자 일궈낸 성과라며 자화자찬하다가도, 주위를 둘러보면 이 글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도와준 숨은 조력자나 곁에서 애썼던 동료들이 이내 눈에 밟힌다.


독립출판으로 책을 낸다 해도, 읽으며 나의 글에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 독자가 없다면 책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사라지지 않을까. 글로 작품을 만드는 일에서 작가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혼자만의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여럿이 힘을 보태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또 다른 분야의 창작자들과 함께 걸어갈 기회를 피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 즐기다 보면 더 풍성해진 나의 글, 아니 우리의 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매주 월요일에 만났던 <망한 글 심폐소생술>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송작가의 일상과 제가 전하는 글쓰기의 소소한 기술에 관해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저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전 09화 일일이 설명하지 않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