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깊은 만남과 이별을 준비하자!
재핑(zapping)이란 말이 있다. 시청자가 방송 프로그램 시작 전후의 광고 시간을 참지 못하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는 행위를 말한다. 요즘 방송을 보면 재핑을 막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눈에 띈다. 광고가 나올 때 화면 상단에 작은 글씨로 프로그램 시작 시간을 카운트다운한다거나, 인기 프로그램이 끝나면 광고 없이 곧바로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어가 시청자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재핑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제작진에게 방송 시작과 동시에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일은 중요하다. 방송가에서는 ‘5분 안에 시청률 승부가 갈린다’고 믿는다. 드라마든, 다큐멘터리든, 쇼오락 프로그램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통용되는 믿음이라, 역사드라마는 1회, 첫 장면에 가장 많은 제작비를 쏟아부어 전쟁 씬과 같이 웅장한 장면을 연출하고, 쇼오락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누구인지 제일 재미있는 장면은 무엇인지 맛보기로 소개한다. 프로그램 출발에서 이미 시청자의 호감을 얻게 되면, 그 방송은 시청자의 재핑이라는 풍랑에 휩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무사히 항해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프로그램의 첫인상은 중요하다.
특별히 다큐멘터리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원고의 시작과 끝을 가리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라는 용어를 쓴다. 프롤로그(prologue)는 연극에서 온 말이다. 연극 개막에 앞서 작품의 내용이나 작가의 의도에 관해 해설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만화 창작 작업에서도 프롤로그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본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주요 사건이 전개되기 이전에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알려주거나 주제를 짐작케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말로 고치면 ‘도입부’ 또는 ‘머리말’로 순화할 수 있겠다. 방송에서는 타이틀이 나오기 전, 오늘 보여줄 내용을 압축하거나 곧 시작될 이야기의 전제가 되는 내용을 소개해 시청자의 호기심을 끄는 기능을 한다.
에필로그(epilogue)는 프롤로그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작품의 끝맺음 부분을 말한다. 연극에서는 극의 끝 대사나 보충 장면을, 만화나 영화에서는 주요 내용이 끝난 후 제공되는 해설이나 정보화면을 떠올릴 수 있다. 방송에서도 에필로그는 이야기를 정리하고 마무리 짓는 부분을 뜻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프롤로그는 작품의 문을 여는 글이고, 에필로그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정리 글이다.
책의 경우에 빗대어 생각하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은 서문이나 머리말에서 작가가 글을 쓴 목적을 소개하고,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지 개괄하여 설명한다. 책의 마지막은 작가의 말이나 옮긴이 혹은 비평가의 의견을 구성해 본문이 주는 의미를 정리하거나 해석을 덧붙인다. 그래서 나는 책을 고를 때, 가능하면 서점에 직접 가서 서문을 먼저 읽어보고 실패하지 않을 확신이 서면 선택하는 편이다. 방송 글의 프롤로그도 시청자에게 다른 채널로 옮겨 다닐 필요가 없다는 선택의 확신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럼, 방송 글의 경우 어떻게 처음과 끝을 매력적으로 쓸 수 있을까?
대본을 쓰는 전체 과정 중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쓰기에 가장 공을 들이는 다큐멘터리 장르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실제 내가 원고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을 쓰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몇 가지 방법들을 소개하겠다. 정해진 공식 따위는 없지만, 나의 경우엔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가 흔들리지 않게 글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글의 첫머리와 끝머리를 쓰다 보니 다음의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들었다.
일단, 사람을 만날 때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을 떠올려 보자. 실제 뇌 과학자들은 우리의 뇌가 상대방의 호감도와 신뢰도를 평가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olomon Asch)는 똑같은 내용의 정보들을 나열해도, 긍정적 메시지를 먼저 배치해야 좋은 인상을 형성한다는 '초두 효과(primacy effect)'를 강조하기도 했다. 사람의 인상 형성에 초두효과가 더 큰 영향을 주듯, 방송에서도 초두효과를 잘 살린 글쓰기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본 방송에서 소개될 사례나 일화 중에 가장 재미있거나 강렬한 이야기의 일부를 프롤로그에 배치한다. 영상의 경우에도, 주제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함축적인 씬(scene)이나 현장감이나 영상미가 탁월하여 사람들을 단숨에 몰입시킬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식이다. 핵심 장면들을 프로그램 시작 때 이미 다 풀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넣어 두어도 좋다. 앞뒤 맥락이나 설명 없이 주요 장면만을 공개하면, 보는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을 갖게 되고 구체적 과정이나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어 텔레비전 앞을 떠날 수가 없게 된다.
첫인상만큼 끝 인상도 중요하다.
비록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지 못해 프로그램 시작부터 시청자를 몰입시키지 못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말자. '초두효과'와 반대되는 개념 중에 '빈발 효과(fequxncy effect)'라는 말도 있다. 첫인상이 좋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과 행동을 보이게 되면 나빴던 첫인상도 점차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현상을 일컫는다. 사람의 경우도 그렇지 않은가. 첫인상은 좋았으나 알면 알수록 실망감을 주는 사람보다, 처음엔 호감이 아니었지만 이별할 즈음 그 사람의 진가를 발견하면 더 오래 기억되고 또 만나고 싶다는 여운을 남기는 법이다.
방송 글도 그렇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나 탐사 다큐멘터리에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나 질문을 던지며 야심 차게 시작했으나, 마무리에 이르러 뻔하거나 두루뭉술한 결론을 지으며 시청자를 허탈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방송 글이 아니더라도, 글의 첫머리에서는 독특한 시각으로 다채로운 내용을 다룰 것처럼 한껏 기대를 주었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풀어놓은 내용들을 다 매듭짓지 못하거나 작가가 제풀에 지쳐 이야기를 얼기설기 끝내버리는 작품들이 있다. 처음을 어떻게 열까 고민하는 만큼 나의 글을 어떻게 끝낼까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첫인상이 좋은 글일수록, 끝 인상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독자의 배신감은 더 크지 않겠는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대본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적지만, 원고를 쓰는 내내 작가를 괴롭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방송 작가들 중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분을 먼저 써놓고 시작해야 글의 전체 방향이 잡힌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본문을 다 쓴 후 심사숙고해서 마지막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쓴다는 이도 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상관없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대구를 이루는 것이 좋다. 일례로, 전문가의 인터뷰로 오늘 다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프로그램 문을 열었다면, 에필로그에서는 전문가나 선진 사례가 보여주는 실질적 대책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며 마무리 지어야 한다. 프롤로그에서 한 개인의 사연으로 시작했다면 에필로그에서는 그 특별해 보이는 사례가 사실,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는 보편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나는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의 과제나 논문을 평가할 때도 글의 서론과 결론이 어떻게 호응하는지를 먼저 살폈다.
서론에서 이 주제에 대해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서술하겠다고 했지만, 결론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하고 끝나버린 글에는 미안하지만 '용두사미'라는 냉혹한 평을 남겼다.
글을 다 썼다면, 처음과 끝부분만 떼서 대조해보자. 둘의 내용을 맞대어 보며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글의 전체 구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본문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서론이나 결론에서 요약, 정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론과 결론을 비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본문에서 논리가 빈약하거나 이야기가 결핍되어 있는 부분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면 된다.
처음 5분에서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지 못하면 관심을 끝까지 이어가기 어려운 방송처럼, 프롤로그는 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반면, 에필로그는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무엇을 위해 이 글을 세상에 내놓고 싶었는지, 독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싶은지 진짜 속내를 마지막 순간에는 전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처럼, 글과 독자의 만남에서도 첫인상과 끝 인상,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