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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Apr 10. 2019

그런 순간이 옵니다

본다는 것의 의미


남편이 야간근무라 집에 혼자 남은 날이었다. 오후부터 두통이 있어 약을 하나 먹었다. 평소엔 약을 먹은 후 삼십 분쯤 지나면 가라앉는데 그 날은 통증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쪽 머리의 묵직함이 점점 퍼져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팔딱거리는 생선 한 마리가 머리 안을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았다. 눈 주위가 욱신거리고 뒷목까지 뻐근해졌다. 새벽 네시, 두통약 네 알째를 삼키고 앉은 자세로 겨우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새벽녘 고통만큼은 아니었지만 머리 전체가 울리는 어지러움은 남아있었다. 일요일이라 문 연 병원을 찾기도 어려워 그날은 침대에 기댔다가 조금 괜찮아지면 거실을 서성이며 하루를 흘려보내야 했다.     


틈틈이 초록창에 증상을 검색하고 관련 질환들을 연결 지으며 혼자 불안감을 키웠다. 월요일 아침, 두통은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왼쪽 눈 주위의 욱신거림은 더 선명히 느껴졌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오래전부터 진료를 받았던 시내 안과로 향했다.     


안과에서 한 시간 가량 검사가 이어졌다. 안과 진료가 끝나고 뒤이어 신경과 검진도 받았다. 뇌 CT에서는 별다른 이상 증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극심한 편두통의 원인은 눈 때문인 듯했다. 의사는 시신경 손상이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녹내장 초기라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순간이 있다. 가까이 있어 귀한 줄 모르다가 그 존재를 잃고 나서야 허전함과 소중함을 느끼고 후회의 한숨을 내쉬는 때 말이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을 풀어 글로 표현하던 나의 일상이 어쩌면 통째로 흔들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랐다. 스치며 지나쳤던 나무들의 잎사귀, 담벼락의 벽돌 모양,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까지도 눈으로 천천히 읽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나에게 본다는 것의 의미가 달라졌다. 길을 가다가도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 있으면 멈춰 서서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이 사람이 이렇게 생겼구나'하며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눈으로 본 것을 마음에, 기억에 담으며 예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다고 인식하면 하루가 더 소중하고 작은 행복마저 감사하게 다가온다고 했던가. 나를 둘러싼 풍경들을 선명하게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하자 사물의 사소한 변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흔하디 흔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들이 그리도 어여뻐 보였다.     


세상을 눈으로 관찰하는 과정은 그들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깨닫는 기회가 되고, 끝내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곤 한다. 눈의 상태가 나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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