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힘든 날이 이어진다면.
“지금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준비한 내용을 모두 쏟아내고 강연자인 내가 한 숨 돌리는 사이, 사회자가 청중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그 말을 신호삼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강연이 끝나고 궁금한 점이 있다는 말은 적어도 이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만큼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두 시간 남짓의 귀한 만남을 영 망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차례로 질문을 있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손을 든 것인지 머리를 만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소심한 몸짓의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의 질문이 모두 끝난 후, 난 그 청년을 기억해 두었다가 "저기 끝에 앉은 분도 아까 손을 드셨는데, 맞죠?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면 편하게 얘기하세요."라며 그에게 정다운 눈빛을 건넸다.
자신을 지목하자 흠칫 놀란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사회자가 주는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작가님도 혹시 글을 쓰기가 무서울 때가 있나요? 요즘 저는 제 글이 부끄러워서 자꾸 숨고 싶어 져서요. 작가님도 슬럼프가 있었는지, 그럴 때 혹시 극복하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듣자, 단박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망한 글 심폐소생술>이라는 책을 내고 출판사에서 북토크를 준비하면서, 신청자들에게 이 행사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와 질문을 짧게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다. 강연일이 다가오자 출판사는 참석자들 중 일부의 사연을 발췌하여 나에게 보냈다.
방송 글쓰기나 온라인 글쓰기를 잘하는 방법이 궁금해 신청했다는 사람들부터, 작가가 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글쓰기 습관을 잡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까지 대부분 글쓰기의 열정은 있으니 실행력을 높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문장을 만났다. 사연은 이랬다. 회사에서 글 쓰는 직무를 맡은 그는 몇 개월 동안 글을 잘 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자신이 작업한 글들은 번번이 상사에게 퇴짜를 맞았단다. 결국 회사에서 글쓰기 업무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퇴사를 권유받았다고 했다. 글 쓰는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고, 그래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럴수록 자기 글이 못나보여서 다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글을 내보이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안타까웠다. 그가 이 짧은 문장을 쓰는 순간에도 자신을 자책하고 낙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뭐라도 된냥, 나중에 강연장에서 혹시 그를 만나게 되면 움츠린 어깨를 토닥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질문을 던진 청년이 그 사연의 주인공일 것이라 직감했다. 그에게 다시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사실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났고 강연 마무리 즈음이라, 그날 어떤 답을 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어서 꾸준히 쓰다 보면 된다고, 포기하지 말라며 소리를 높였던 것 같다. 내가 뭐라고, 건방지게도.
올해 여름, 다이어리에는 우울한 소식이 가득하다. 7월과 8월의 일정에는 유난히 ‘X’ 자가 많은데, 창작자이자 강연자인 나에게 혹독한 기간임을 뜻한다. 3개의 공모전에 연이어 도전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원래 계획했던 강의 중 절반의 강의가 수강생 수를 채우지 못해 폐강되었다. 십여 년의 대학 시간강사 시절에도 나름 인기 강의들을 맡아 한 번도 폐강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 충격이라면 강연 취소에 더 충격을 받아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공모전 탈락이 더 큰 좌절감을 주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도 의아해했다. 수십 대 일, 수백 대 일의 공모전에 작품을 내면서 자신의 글이 채택될 거라고 기대하는 내가 오히려 허황된 것 아니냐고 조곤조곤 말했다. 역시 남편은 냉정한 사람이다 못해 냉혈한이었다.
남편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 번째 낙방 소식 이후부터는 어떤 글이든 이어서 쓰기가 쉽지 않았다.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쓴 기획안과 글들이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다른 작가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들을 만나니 나의 글이 더 비루하게 보이고 주눅도 들었다. 나와 비슷한 경험, 아이디어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작품을 구성할 수 있었을까, 가슴을 찡하고 건드리는 이런 표현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부러움은 질투로, 질투는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몇 년간 쉼 없이 달리다가 잠깐 멈칫하는 순간, 슬럼프란 녀석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어 내 안에 싹을 틔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름이고 하니 나에게 며칠만 휴가를 선물하자며 무작정 펜을 놓았다. 그 사이 여행도 다녀오고, 미뤄두었던 집안의 일들도 처리해나갔다. 글쓰기에서 도망치는 심정으로, 우울한 마음을 떨쳐내려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몸살이 났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아프다는 핑계로 며칠 누워 있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몸살이 나으면 다시 책상에 앉아 어떤 형태의 글이라도 써보자고 다짐을 이어가며 침대에 파묻히기를 이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글쓰기를 피해 도망 다닌 지 한 달이 훌쩍 지나있었다.
변명을 하자면, 글쓰기는 멈춰 있었지만 타인의 글을 읽는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대신 내 글을 쓰기 위해 참고를 하겠단 마음을 내려두었다. 그날그날 마음이 내키는 대로 책을 집어 들었다. 첫 회를 읽기 시작하면 다음회로 향하는 손가락을 멈출 수 없는 웹소설과 웹툰, 내 마음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집어 든 자존감에 대한 심리학 책, 여름밤 열대야도 잊게 만든 추리소설, 만원 인파의 지하철도 파도소리 가득한 섬처럼 느끼게 해 준 시집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밤이 오면 가슴에 남기고 싶고 머리에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을 필사했다. 만년필로 정성껏 필사한 문장 옆에는 연필로 흘리듯 그 문장을 읽을 때 든 나의 감정과 생각을 메모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글을 쓰며 인정받지 못해 속상했던 마음들이 조금씩 물러가고 그 자리에 나도 이런 글들을 쓰고 싶다, 언젠가는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불씨들이 찾아들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 지난겨울에 인상 깊었던 그 청년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돌려 그의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슬럼프요? 바로 지금 제가 겪고 있답니다. 어떻게 극복하냐고요? 글쓰기의 두려움은 다시 경험해보니 좀처럼 이겨낼 수가 없는 거였네요. 저는 아직 이 터널을 빠져나오는 법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글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쓰고 싶은 글은 어떤 모습인지 가만히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지겨울 때까지 충분히요. 그 시간들을 통과하면 하나는 분명해지지 않을까요? 글을 못쓴다는 자책도, 잘 쓰고 싶다는 욕심도 결국 ‘글 쓰는 나’의 모습을 사랑해서 생긴 감정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시간을 더 들여 충분히 방황합시다. 그리고 말인데요, 그때 뭔가 아는 척 떠들어서 미안했어요, 정말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