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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Oct 29. 2019

13년 후 우리는

결혼 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내가 이럴 줄 몰랐다.     


창틀 청소를 몇 달째 하지 앉아 새하얀 창틀에 까만 먼지들이 소복이 쌓이게 할 줄은. 밥 먹는 것도 귀찮아 빵을 한가득 사다 놓고 커피 한 모금에 빵 한입을 뜯어먹으며 한 끼를 때우고 있을 줄은, 13년 전에는 정말 알지 못했다.      


나는 꽤 괜찮은 아내이자 능숙한 주부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결혼 전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게일로 바쁜 엄마를 쉬게 하겠다며 주말이 오면 대청소를 도맡아 하던 나였다.      


일하던 시간이 일정치 않던 방송국 생활을 하면서도 삼시 세 끼는 야무지게 챙겨 먹었고 밥과 국, 김치가 있는 식사를 해야 힘이 생긴다고 외치던 밥순이 었다. 과거의 나는 살림에 꽤 소질이 있고 분명 엄마의 손맛을 닮아 요리 재능을 타고났을 것이라 확신했다, 어리석게도.      


그가 이럴 줄 몰랐다.      


희귀한 운동화와 화려한 운동복을 좋아해 해외직구의 세계까지 발을 들였고 결국 상표도 떼지 않고 상자도 개봉하지 않은 새 물건들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게 할 줄은.     


취미로 시작한 테니스에 중독되어 하루 두 시간은 혼자 벽치기라도 해야 하고 그립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나와 외출하는 순간에도 가방 대신 라켓을 들고 집을 나설 줄은, 결혼 전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데이트할 때 그는 나밖에 모르는 바보 같았다. 쇼핑을 하러 가면 내 눈길이 멈추는 구두, 옷들을 봐 두었다가 돌아가서 사자고 보채거나 몰래 사 와서는 감동을 주면서도 정작 본인 것을 고르라고 하면 회사에서 작업복만 입으니 필요한 게 없다며 도망치던 사람이었다.      


자기 회사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던 나의 일터 앞을 매일 저녁 찾아와 피곤한 내색 없이 환한 미소로 기다리고 귀갓길을 동행하던 다정한 애인이었다. 그의 성실함과 우직함이 결혼한 후에도 나만 바라보게 하는 동력이 되리라 착각했었다, 미련하게도.       


13년 전 오늘, 우리는 떨리던 손을 서로 잡아주며 부부의 서약을 맺었다. 그동안 외모, 입맛, 취향, 성격까지 어디 변한 것이 한, 두 가지이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오늘 아침, 서로를 바라보며 참 잘 살았다고 칭찬해주었다. 철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상대의 마음에 큰 생채기 내는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안심이 들어서였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굳이 종이에 써놓거나, 가슴에 손을 얹고 선서는 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실천하고 있는 몇 가지 다짐들이 있다. 먼저 안 되는 일에 너무 애쓰지 말자는 것이다. 결혼 후 실체를 드러낸 ‘나'는 청소를 싫어하고 살림은 젬병이었다. 몇 달을 산 후 남편은 가사를 나누어 좀 더 잘하는 사람, 쉽게 하는 사람이 각자의 영역을 맡아서 하자고 제안했다.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데 작은 일 하나도 너무 애쓰며 살다 보면 쉬이 지치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그날 이후 청소는 남편이 전담하게 되었고 빨래는 내가 도맡았다. 요리는 둘 다 잘하지 못하는 분야임을 인정하고 되도록 외식을 하되, 꼭 집밥을 먹고 싶은 날이 있다면 서로 말을 하기로 했다. 집 밖을 나서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일 투성이인데 집에서라도 ‘포기하는 용기’와 못하겠다고 말하는 솔직함을 누려도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또 하나는 부부라도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유를 하는 일이 직업인 나에게는 하루 중 홀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틈이 꼭 필요하다. 만약 그때마다 남편이 옆에 있다거나 그 시간과 공간을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결혼 후 지금까지 나의 커리어와 정체성을 이어올 수 없었을 것 같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풀어야 할 고민이 있을 때 남편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온 몸이 땀에 젖을 때까지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는 행위가 그에게 얼마나 신성한 것이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인지 잘 알기에 나 역시 방해하지 않고 지지해주려 애쓴다.     


13년 전 오늘 있었던 우리의 결혼식은 오전 11시, 예식장의 첫 타임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부터 준비를 하다 보니 미용사도, 사진사도, 예식장 관계자들도 우왕좌왕했다. 하객들도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세배 가까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내가 입었던 신상 웨딩드레스는 비즈가 옷 전체에 박혀있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몸이 갸우뚱 흔들렸다. 예식 내내 넘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표정은 굳었고 등줄기에선 땀이 났다. 


그날 누가 참석했고, 무슨 말들이 오갔고,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도 내가 잊지 않는 한 문장,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도는 한 마디가 있다. 폐백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묵직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신의를 지켜라!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 살다 보면 뭐든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부부가 신의를 지킨다면 그 어떤 난관도 잘 흘려보낼 수 있더라. 그러니 신의를 저버리지 말고 살아라."     


‘둘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라’가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는 벗이나 형제에게 하는 말인 양 믿고 의지하며 지내라고 조언하시다니, 어머니도 참 낭만을 모르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이서 희로애락의 시간들을 맞닥뜨리고, 견디고, 흘려보내면서 부부 사이에 진짜 '신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변하고 사랑이 퇴색해도 한 인간으로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고난 속에서 의지할 수 있도록 어깨를 내주는 존재가 된다면 결혼 생활이라는 꽤 까다로운 길도 터벅터벅 걸어갈 만하지 않을까.     


같이 사는 집이 좀 지저분하고, 쇼핑을 멈추지 못해 통장 잔고가 남아나지 않아 잔소리를 할지언정, 우리는 꽤 괜찮은 파트너라며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가려 한다. 앞으로 13년 후, 26년 후에도 다양한 이유로 배우자에게 실망할 날이 많겠지만, 우리 사이에 ‘신의'만은 저버리지 말자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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