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화
방송작가로 함께 일했던 후배가 동화를 쓴다고 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이자 두 딸을 둔 엄마가 된 그녀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다 직접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고 했다. 몇 편의 동화를 쓴 후 초등학생인 딸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었는데 "별론데! 재미없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낙담했다. 내용이 궁금하여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도 읽어달라고 졸랐다.
딸의 반응과는 달리 나를 비롯한 지인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아직 발표된 작품이 아니기에 여기서 내용을 옮길 수는 없지만, 일단 듣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빠져들게 되고 다음 행동이나 상황이 점점 궁금해졌다. 특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상상력이 십분 발휘된 캐릭터들이 매력적이었는데 사물이나 동물, 식물이나 곤충을 의인화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처럼 생명을 부여하고 개성을 입혀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니 나도 모르게 그들이 느낄 감정에 자꾸 동일시 되었다. 어린 시절 동화를 읽다가 달이, 구름이, 토끼가 심지어 똥이 살아있는 것 같아 응원하고 친구가 되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려보시라.
의인화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법이기도 하다. 주로 물질보다는 정서나 감정, 자신의 습관이나 현상, 사건 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의인화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럼 수강생들은 너무 유치한 시도 아니냐며 미간을 찌푸리거나 코웃음을 친다.
글쓰기 모임을 이끌려면 이런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뻔뻔함이 필요하다. 유치한 시도를 잘 수행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겠다며 어르고 달래서 펜을 드는 데에 성공했다면 이후의 시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의인화는 글쓴이도 몰랐던 내면의 문제를 발견하고, 묵혀 두었던 아픔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이야기가 몇몇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학인은 ‘불안’이라는 감정에게 편지를 썼다.
‘불안’의 존재를 처음 알아차린 순간은 언제인지, ‘불안’이 곁에 있어 자신의 일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제는 헤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불안’에게 진짜 전하고 싶은 말을 무엇인지 써 내려갔다. 그녀는 인생에서 불안이라는 감정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불안함을 인지하고 조금이라도 그 감정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부분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는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떠느라 현재의 긍정적인 감정과 행복을 돌보지 않는 어리석음을 줄이겠다는 다짐도 글로 표현했다.
20대의 또 다른 학인은 10대에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에 이름을 붙이고 의인화했다. 십 년 동안 벗어날 수 없었던 사건의 악몽을 하나의 인물처럼 대하자 불행의 원인이 곧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움츠려있던 학인은 이름을 붙인 문제로부터 거리두기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으로 설정된 그 사건과 힘들지만 이별을 고할 수 있었고, 이제는 자신과는 동떨어진 외부의 존재로 인식하여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며 안도했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쓴 작가들의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 종종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실존하는 것처럼 말한다. 자신이 인물을 창조한 것은 맞지만 글을 쓰다 보면 작가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인물이 나아갈 때가 있으며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주인공이 어디엔가 살아있을 것 같아 안부를 묻고 싶어 진다고 전하기도 한다.
작가들의 조언을 새겨 우리가 만드는 이야기에서도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해보자.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감정이든 상관없다. 실체가 있는 존재라고 믿고, 그 또는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가려하는지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진지하고 진심인 그들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에게 제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물들보다 더 실제 같아요. 글을 쓰는 예닐곱 달 동안 이 인물들은 제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일종의 우주를 이루는 것이지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란 무엇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