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함을 견디게 만드는 몰입의 힘
학창 시절,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곧장 달려가는 곳이 있었다. 한, 두 달 인고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출입이 허락되던 그곳은 바로, 만화방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만화책들 중 필자가 기다리던 혹은 처음 만나는 이야기를 선택하던 순간의 달콤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작심하고 찾아간 만화방이지만 책을 고르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들 중 완결되었거나 적어도 10편 이상 출간된 만화책을 한꺼번에 빌려 집으로 낑낑대며 들고 왔다.
뜨끈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후 손이 닿는 곳에 달콤 짭짜름한 과자들을 펼쳐두고 만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밤이 지나가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만화책을 감질나게 한편씩 기다리며 읽는 것은 애당초 자신이 없었다. 다른 재능은 없어도 책을 오래 볼 자신은 있었기에, 단편보다는 장편의 서사를 선택해 ‘몰아보기’의 늪에 스스로 빠져 들곤 했다.
필자가 다시 몰아보기의 늪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넷플릭스 때문이었다. 사십 대 중반이 되어서도 타인이 만든 허구의 세계에 빠져 밤새 허우적거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행인 점은 몰아보기의 늪에 빠지는 행위가 나만의 일탈이 아니라 점점 영상을 즐기는 보편적 방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하우스 오브 카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시리즈 출시 이후 프로그램을 특정일에 몰아보는 사람이 많아지자 2013년,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몰아보기(binge viewing)’가 신조어로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지금까지 언론이나 학계에서도 ‘몰아보기(binge viewing)’란 단어를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물과 같은 콘텐츠를 ‘몰아보기(binge viewing)’하는 현상은 우리가 영상 스토리를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것은 방송국이 작성한 편성표에 따라, 매주 혹은 매일 단위로 방영 시간을 기다리는 텔레비전 시청과는 확연히 다르다. 몰아보기는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분량만큼 콘텐츠에 몰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가 아니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방송사에서 방영된 후 한 시간 또는 하루 뒤에 곧바로 넷플릭스에서 해당 콘텐츠를 공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TV를 통해 매주 만날 수 있는 드라마지만,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일주일 간 마음을 조리는 대신, 작품이 완결되기를 기다려 몇 번의 클릭으로 몰아보기를 선택하는 시청자들이 늘고 있다. 텔레비전 시청 흐름의 중요한 요소이던 ‘시간’이라는 기준과 규범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를 시청하다 보면, ‘몰아보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데에 넷플릭스가 큰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점을 체감할 수 있다. 콘텐츠를 몰아서 볼 때 방해가 되는 요소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첫 번째 기술은 에피소드 한 편이 끝나면 다음 편으로 자동 재생되는 ‘post-play’ 다. 이 설정은 시리즈 중 다음 화로 넘어갈 때 광고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제가가 흘러나오며 제목과 주인공, 제작진 등을 소개하는 타이틀과 콘텐츠가 끝난 후 나오는 엔딩 크레디트이나 다음화 예고 등도 가뿐히 넘겨 버린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되었지만, 처음 넷플릭스를 접했을 때 이용자가 어떤 기기를 사용하든 몰아보기를 하다 멈추면 다음번 시청 시 중단한 곳에서 바로 이어서 볼 수 있는 기술에 감탄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시청 경험을 넷플릭스가 책갈피를 끼워두듯 기억했다가 읽어야 할 페이지를 활짝 펼쳐 바로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러한 기술들은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에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하는 스토리텔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매주 단위의 드라마라면, 60분 단위의 한 회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내일 혹은 내주에도 시청자가 먼저 TV 앞으로 와서 드라마 시작을 기다릴 미끼를 투척하는 이야기 구조를 세워야 한다. 매회 갈등의 절정에 에피소드가 끝맺거나 다음 장면의 시작이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콘텐츠 이용자들이 ‘몰아보기’를 선택할 것이라 가정한다면 어떨까?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기 위한 구조를 짜기보다는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면 된다. 지난주 주요 장면을 놓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시청자들을 위해 회상 장면을 넣거나 주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구성을 굳이 넣을 필요도 없다. 하이라이트나 설명적 장면들을 최소화하고 중복된 이야기를 덜어내는 노력으로 이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한 시리즈 내에서 일관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시청자들이 긴 서사의 흐름을 따라올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들을 만들어야 한다. 한 에피소드가 독립된 이야기이면서도,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한 에피소드별로 하나의 퍼즐을 제공하는 형식이다.
이를 이른바 '퍼즐형 서사'라고 부르면 어떨까. 시청자들은 몰아보기 중 어떤 에피소드에서 멈춰서도 상관없지만, 다음 퍼즐을 맞추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영상을 플레이하기를 원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시즌 1화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를 하나씩 제공하는 ‘중심 사건’을 두고, 매 회 갈등 해결이 가능한 작은 사건과 소주제 등을 배치하는 식이다.
OTT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스토리텔러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육체의 고단함을 무릅쓰고, 긴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보고 싶은 몰입력이 강한 서사를 구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 작품의 세계관까지 보다 섬세하고 견고한 기획과 설계 작업을 마친 후 집필에 들어가야 비로소 몰아보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매력적인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