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도, 나에게도.
얼마 전 열한 살의 조카는 예기치 못하게 3주 동안 입원을 해야 했다. 자타공인 조카 바보인 나는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짧은 면회조차 할 수 없었다. 조카의 안부가 궁금하면 영상 통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언제 벗어날지 모르는 병원 생활을 이어가는 조카가 안쓰럽고, 보호자 교대를 할 수 없어 아이와 꼼짝없이 병상에서 하루를 보내는 올케가 걱정됐다.
“수민이도, 올케도 너무 갑갑하지? 괜찮아?”
망설이다 안부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저도 수민이도 잘 지내고 있어요. 수민이는 신이 났어요.”
“왜? 이제 안 아프대?”
“배는 아직 아픈데, 옆 자리에 좋은 언니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사연은 이랬다. 조카 옆 침대에 며칠 전 중학생 언니가 입원을 했는데, 조카가 그 언니에게 반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병원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궁금했다, 지루하고 힘든 조카의 병원 생활에 단번에 활력을 불어넣은 그 언니의 매력이 무엇인지.
조카는 유아기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일찍부터 미술 학원에 보냈다. 조카가 4학년이 되었고 이런저런 일과로 바쁘거나 체력이 떨어져 미술 학원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말해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며 계속 다니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부터 학습용 패드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보니 손가락만으로도 뚝딱뚝딱 패드의 하얀 면을 알록달록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생 언니가 자신과 똑같은 패드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카는 마술봉과 같은 펜을 들고 침대에 앉아서도 금세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려나가는 언니의 모습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옆 자리 언니는 성격도 상냥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조카에게 패드에 그림을 그리는 갖가지 기술들을 친절히 알려줬고 조카는 스펀지처럼 언니의 지식들을 흡수했다.
이후 ‘언니 바라기’가 된 조카는 나에게 그 언니가 그린 그림이라며 사진을 찍어 메시지로 보내주기도 하고, 언니에게 배워 자신만의 캐릭터를 6개나 창작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그동안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몰라요!”라고 답하거나 어른들은 왜 그런 걸 자꾸 묻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답을 회피하던 아이가 이젠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꿈이 생겼다고 선언한다는 점이다.
“고모, 전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거예요.”
아이가 이렇게 확신에 차서 자신의 꿈을 말한 적이 있었던가!
조카는 자신이 선망하는 그림 실력을 가진 언니에게 혼자 그림을 그리며 쌓아두기만 했던 궁금증들을 풀어냈고, 끝내는 일러스트레이터란 직업을 알게 되고 본인의 꿈으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조카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인생에서 언니가 필요한 순간이 있지.’
다양한 이력을 거치며 23년 차 프리랜서로 살아온 내게도 기억에 남는 언니들이 있었다. 학창 시절 처음 방청객 아르바이트를 갔던 날 대본을 들고 종횡무진하던 방송국 언니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들려주며 카리스마를 뿜던 강연가 언니들, 나를 돌보며 글을 쓰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몸소 보여준 작가 언니들까지. 그들이 앞서 걸으며 손을 내밀거나 발자국을 만들어 주었기에 초행길에도 나는 방향을 잡아 나아갈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꿈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는 사람, 언니!
그래서 열한 살의 조카에게도, 마흔다섯의 나에게도 여전히 ‘언니’는 필요하다. 물론 그 언니는 꼭 같은 성별일 필요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쟁취한 사람일 필요도 없다. 되려, 실패를 거듭해 본 언니라면 나의 고민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너그러움과 나의 물음을 허투루 듣지 않고 같이 숙고해줄 신중함을 가졌을지 모른다.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에서 세 주인공 중 한 명인 보람에게 좋은 상사이자 믿고 의지하던 선배인 본부장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는 앞만 보며 달려가다 멈칫하는 20대 후배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저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좋은 걸 못 찾겠으면, 아무거나 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돼요?"
"... 그럼.. 재미없잖아."
우리에게는 정답을 알려주는 언니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오랜 시간 속에 담에 두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질문을 말하게 하고, 가만히 들어주는 언니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