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이 시작되는 시간
어린 시절, 명절 때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를 따라 방앗간을 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할머니가 가져간 쌀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떡이 되어서 나오고, 빨간 고추가 빻아져 고운 가루가 되어 쏟아지는 광경은 어린 내게 신기함 그 자체였다. 방앗간에서 한참을 기다리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넋을 놓고 보게 만드는 마술 같았다. 지금도 ‘방앗간’이란 말을 들으면 그때 고춧가루의 매운 냄새와 갓 나온 떡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한 때 나는 동네에 ‘글 짓는 방앗간’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공간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
동네마다 작은 공방에서 삼삼오오 모여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수줍게 전시하는 것처럼, 글쓰기 공방을 차려 글을 보다 쉽게 쓰는 방법을 공유하고 삼삼오오 모여 자신이 쓴 글을 들려주거나 작은 책으로 엮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글 짓는 방앗간’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연이 누군가에게 온기를 주는 스토리가 되고, 나만의 추억과 경험들이 작품으로 탄생해 타인의 가슴까지 날아가는 고운 가루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굳이 글쓰기 공방을 차리지 않더라도 방송 스토리텔링을 하던 순간, 순간들이 ‘글 짓는 방앗간’을 실현하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쌀이 떡이 되고, 딱딱한 곡식이 가루가 되는 마법의 과정을 꼽으라면 ‘구성안 쓰기’가 아닐까?
구성안은 방송 촬영이나 녹화에 앞서, 기획 단계에서 그 프로그램의 얼개를 정리하는 계획표, 또는 설계도라 말할 수 있다. 구성안 쓰기의 핵심은 하나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소주제들을 분류하고, 이 소주제들을 제작진들의 논리에 맞게 전개시키는 일이다.
구성안의 형식은 주로 표로 만들어서 사용하는데, 프로그램에서 전달할 내용의 항목을 나누고 각 항목별로 어떤 영상을 보여주고, 어떤 멘트를 들려줄지 순서대로 간략하게 서술한다.
그런데 구성안을 쓰기 전에 꼭 거쳐야 할 작업이 있다. 자료조사나 취재, 인터뷰 등을 통해 얻은 재료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재료들을 어떻게 묶거나 가공하여 하나의 줄거리로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같은 재료라도 방앗간에 따라 떡 맛이나 종류가 달라지듯이, 같은 소재와 정보들을 가지고도 어떤 스토리텔러를 만나느냐에 따라 방송의 방향은 확연히 달라진다.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 ‘폐지 줍는 할머니의 사연’이라는 재료에서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시사 프로그램의 구성안이 나올 수도 있고, 한 할머니의 기구한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고 시청자들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휴먼다큐멘터리가 탄생할 수도 있다.
같은 휴먼 다큐멘터리라도 할머니의 하루 중에서 도로 위에서 리어카를 끌고 위험하게 걸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폐지 수집으로 모은 꼬깃꼬깃한 돈을 보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표정에 주목할 것인지에 따라 프로그램의 주제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렇듯 어떤 부분을 강조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몫이 방앗간 주인의 손맛 즉, 방송 스토리텔러의 실력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짓는 일은 책임감이 따르면서도 성취감을 주는 ‘업(業)’일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방앗간을 따라나선 나는 할머니에게 오늘은 어떤 떡을 만들러 가는지 미리 물어보지 않았다. 방앗간 기계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우리가 가져온 쌀이 가래떡이 되었는지, 인절미가 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꿀떡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 기다림 자체가 재미있는 놀이이고 설렘을 즐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늘 당신이 선택한 방송 소재가 따끈따끈한 구성안으로 탄생하고, 그 구성안으로 근사한 요리나 상차림 같은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가슴 속에 따뜻한 글짓기 방앗간을 품고 있는 셈이다.